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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Apr 08. 2023

연구윤리심의(IRB) 스트레스

IRB라는 게 있다. 토악질 나오게 만드는 행정악인데 (선배 말마따나 필요악도 아니다, 그냥 악이다), 연구 시작 전에 연구윤리를 심의받는 과정이다. 허울은 얼마나 좋은가. 연구대상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연구윤리를 심사한다니. 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작업인가. 근데 문제는 이 연구윤리심의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복불복, 나만 아니면 돼~~~ 라는 거다. 



최근 IRB 검토에서 사실상 연구불가 판정을 받았다.


15개의 날선 코멘트를 받았는데, 일견 건설적인 비판도 있었으나, 동의되지 않는 부분이 훨씬 많았다.


IRB를 통과했던 동료들의 서류와 정부에서 진행하는 대형프로젝트의 IRB 서류를 참고하여 작성(심지어 동일한 방법론을 적용)하였는데도 통과된 서류들에서 문제시 되지 않았던 부분들까지 모두 문제시하더라. 이는 IRB 본인들 스스로가 얼마나 제대로 된 기준이 없는지 반증하는 거라고 본다. 그리고 동료들의 통과 서류와 다시 비교해보니, 서류가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물어뜯는 부분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오히려 보다 덜 자세하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경우에는 문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면 자기들이 ‘읽은' 문서에 나타난 정보가 적으니, 비판할 대목도 적어지는 거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윤리 측면에서 더 많이 고민해서 더 많은 대안을 제시하며 서류를 열심히 쓴 연구자가 더 크리틱을 많이 받는 셈이었다. 



연구가 민감한 주제일수록 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 대목에서 많은 학자들이 IRB가 연구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검열 도구로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나는 그렇게 거창하게 의미부여 해줄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그 속까지 까고 까고 들어가보면 그냥 행정적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적나라한 의도만이 있을 뿐이다. 후에 그 연구가 어떠한 행정적, 법적, 정치적 논란에 휩싸일까봐 무서워서 무사안일주의를 채택하는 것에 불과하다. 뭔 정치적 검열같이 멋진 미사여구씩이나. IRB의 내재적인 오류를 보면 그럴 깜도 안된다. 그런 행정적 무사안일주의가 결국 연구자의 입을 막고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는거다. 사회학에서는 더욱이 그렇다. 기존에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소외되고 있던 집단과 사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사회학 연구의 가치인데, IRB는 기존에 검증된, 리스크가 적은 주제만을 다루도록 유도하니 이는 사회학 연구의 본질적 의의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사회과학분야의 IRB에 대해 이런 비판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사회과학 IRB들이 연구 윤리에 대해서만 평가하는 게 아니라 ‘연구 자체'에 대해서 평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맨 처음 IRB가 도입되었던 생명실험연구 분야에서는 이제 IRB가 몇 주도 안걸리고 통과가 잘 된다고 한다. 그건 그 실험들의 프로토콜이 일정 수준 표준화 되어 있으며, IRB가 실험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연구윤리만을 검토할 뿐, 연구주제 자체를 검토하지는 않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근데 사회과학 분야의 IRB들은 연구 자체를 검토하려고 든다. 나는 최근 IRB에서 내 연구 주제가 ‘디지털세계'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서 ‘구식'이라는 코멘트를 받았다. 약물사용과 성적위험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구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무식한 용기에 대해서 일단 놀랐으며, 내 연구 주제가 실제로 구식이라 할지언정 그게 연구윤리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지 의문이었다. 



심지어 이놈의 IRB는 빨리 빨리 되지도 않는다. 우리 학교 같은 경우는 연간 4차례 열리는 게 전부라서, 3개월에 한번씩 밖에 검토를 받지 못한다. 그럼 첫번째 세션에서 IRB 통과를 받지 못하면 최소 6개월이 연구가 지연되는 셈이다. 이게 말이나 되나. 박사과정생이라 시간이 촉박한 건 논외로 치더라도, 연구윤리심의에만 6개월을 쓴다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그야말로 과잉행정이다. 막상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한들, IRB가 과연 진정으로 연구대상자 보호에 도움이 되는가? 그렇다는 증거자료도 없다.



IRB를 받는 것이 IRB의 본래 목적인 ‘연구대상자 보호'에 적절한 수단인지 의문이 든다. IRB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요건 중 하나가 인터뷰 연구 시 무조건 참여자에게 서면 인터뷰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거다. 근데 만약 우리가 불법체류자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생각해보자. 불법체류자한테 내가 이런이런 기관에서 나왔고, 당신과의 인터뷰는 연구에만 쓰일 거다. 그 사실에 동의하면 이 서류에 ‘서명해라’, 라는 말이 안도감을 주겠는가 위압감을 주겠는가? ‘서명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아무리 휘갈겨진 단어라 할지언정 그 행위 자체에서 오는 중압감이라는 게 얼마나 무거운가. 과연 그런 서명을 해놓고, 인터뷰 대상자가 진솔한 이야기를 편하게 하겠는가? 더 나아가 그 대상자가 연구에 참여나 하겠는가? 이게 바로 검열이다. 대놓고 이 연구는 하면 안된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절차상의 규정을 만들어놓으면서 연구자가 목소리를 수집해야 하는 연구대상자에게, 그리고 연구대상자가 연구자에게 접근하는 문턱을 과도하게 높게 만들어두는거다. 그럼 결국 그 문제와 그 대상자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제화 할 수 없게 된다.



애초에 IRB가 모든 분과의 연구에 대해서 윤리검토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내재적 오류다. 박사들도, 심지어 교수들도 자기 전문분야가 아닌 분야에 대해서는 같은 전공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의견을 내지 않는 법인데, 어떻게 IRB 멤버들이 모든 분과의 연구에 대해 연구윤리를 검토할 수 있느냔 말이다. 예를 들어, 단 한번도 양적연구를 해본 적이 없는 연구자가 양적연구에서 사용되는 방법론에서 촉발될 수 있는 연구윤리적 문제를 검토하는게 말이나 되나. IRB도 바보가 아닌데, 해당 전문가에게 리뷰를 맡기지 않겠냐 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이건 학계의 풍토를 안다면 그리 쉽사리 이야기하기 어려운 문제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에디터이자 리뷰어로 활동하는 저널 같은 경우에도 리젝 사유를 보면 이 분야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이 평가했다는 게 한 눈에 보이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물며 IRB는 어떻겠는가. 그나마 저널은 사회심리학이면 사회심리학, 아동보건이면 아동보건 이렇게 필드라도 정해져있지 않은가. IRB는 그런 전공 간 장벽도 없이 마구잡이로 전공을 넘나들며 연구윤리라는 미명으로 연구를 검토한다. 실제로 이번 IRB에서 모집단 데이터가 없는 (즉, 표본의 집주소, 이메일, 핸드폰 번호 등이 없어서 대상자에게 직접적으로 접촉할 방법이 하나도 없는) 비확률적 표본추출로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에 대상자의 데이터가 환원가능하지 않다는 설명에 대해서, 어떻~~~게 비확률적 표본집단이 대상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코멘트를 받았다. 과연 이 리뷰어는 비확률적 표본이 뭔지 알기는 아는걸까? 어떤 IRB는 첫 인터뷰 대상자를 통해 새로운 인터뷰 대상자를 소개받는 식으로 진행되는 눈덩이표집방법에 대해 윤리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반면, 또 어떤 경우에는 그 방법을 지적하지 않고 넘어간다. 그냥 복불복인거다. 걸리는 놈이 운이 드러운거다. 특히나 더 IRB가 운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게, 1년차 박사생 한명은 이번 IRB가 통과됐는데, 우리 지도교수는 불통을 받았더랜다.. 그럼 그 1년차 박사생이 지도교수보다 연구적 역량이 뛰어나고 윤리적으로 세심했기 때문에 IRB를 통과할 수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 있다. 근데 그 두 사람이 학계에서 구른 짬을 비교해보면, 그 이 외의 여타 운빨요소 (연구주제의 리스크, 리뷰어의 특성, 전문성 등등)가 적용했을 가능성이 더 높을 거라고 본다. 



아무리 학계에서 운이 많이 작용한다는 말이 이리저리 풍문으로 들려온다고 해도, 연구의 시작점에 이토록 운빨적인 장벽을 세워두면 도대체 어떻게 안정적으로 연구를 하라는 건지 의문이 든다. 심지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장벽인지 설득력도 점점 떨어진다. 한국에 게이 커뮤니티의 성관계를 위한 약물사용 즉, camsex를 연구하는 단체가 있다. 그 단체의 보고서 서문에는 ‘이 보고서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 연구모임의 책임입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선배가 그런 말을 하더라. IRB에서 요구하는 여기에 서명해라 저기에 서명해라 하는 따위의 요식행위보다 이 한 문장이 연구대상자 보호에 더 와 닿는다고. 



난 이 IRB문제를 프랑스에서 겪었는데, IRB가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도입되었던 미국에서도 수년전부터 IRB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미시건 대학의 법학 교수이자 내과 교수인 Carl E. Schneider은 어찌나 열이 받았는지(?) ‘The Censor’s Hand’라는 책도 썼다. 법학에 내과 교수까지 한 사람도 열 받아서 IRB로 책까지 낼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닌가. 프랑스에서도 이미 IRB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문들이 속출하고 있고, 최근 한국 경제인문사회연구회에서도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들의 연구윤리위원회 갈등 경험 및 개선 방안 연구' 라는 연구 총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IRB로 속앓이 하는 사람들은 다 읽어보시라. 앓던 이가 빠지진 않겠지만 그래도 나 혼자만이 겪는 부조리한 경험이 아니라는 점에서 빠른 속도로 화가 줄어들긴 한다. 아무튼. IRB가 종래의 목적과 달리 신진연구자들의 연구에 대한 의지를 꺾고, 더 나아가 연구행위 자체에 회의를 들게 만드는 제도적인 허들로 작용한다는 건 틀림없다. 맨 처음 IRB 레터를 받았을 때,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두근두근 열이 오르던 때와 달리 며칠 시간이 지난 지금은 차라리 박사생 초반에 이런 크리틱을 받은 게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허들로 인해 박사과정, 더 나아가 학계 전반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고찰하게 됐고 내 박사생활과 연구, 진로에 대해서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에라이 박사가 뭐 인생의 전부냐. 당장 때려쳐도 안 굶어죽는다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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