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ne Gray Aug 30. 2024

내 속도, 완벽주의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남들을 제치고 빠른 속도로 가거나 적어도 남들과 속도를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내가 잘하는 것이 있다면 남들과 다른 속도로 가는 것(주로 느림)을 그나마 잘 견뎌내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잘 믿는 것은 남들보다 느리게 가는 것이 남들보다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를 할라치면, 내 가족들은 "또 히말라야 이야기 하려고 하지?"라며 귀를 틀어막는다. 그렇다. 12년 전에 올랐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ABC)에서 나는 부족한 체력 때문에 오르는 동안 일행들 발목을 몇번이나 잡아챈 주제에, 느리게 걸었다는 이유로 고산병에 잘 적응하여 마지막 캠프에서 피자도 먹고 콜라도 마시고 다했다. 최근에 완주한 하프 마라톤에서도 그랬다. 연습하는 동안 매일 같이 같이 뛰는 동료들을 잡아 세우고 좀만 쉬다 뛰자고 헥헥 거리던 주제에, 결국 마라톤 당일에는 누구보다 쌩쌩하게 참가해서 평소 기록보다도 좋은 기록으로 경주를 마무리했다.


그니까 나는 남들보다 빨리가는 것은 절대 못해도, 남들보다 멀리가는 것은 곧잘 한다는 거다. (제게 발목 잡히신 분들께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시험 준비 한답시고 대학을 6년을 다녔고, 그 뒤로도 제대로 취업도 못해서 허송세월한 게 일년이 가깝다. 내가 뒤쳐진 사람이었던 적이 많았던 터라 그 입장에 선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와닿는다. 뭐 또, 내가 뒤쳐졌다고 하면 지금 해외에서 팔자좋게 유학까지 하는 마당에 뭐가 뒤가 쳐졌냐라고 하실 분들이 많을거다 (대표적으로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그만큼 너무나도 많은 것을 못해보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맞다.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입장이라는 것도 잘 알고, 또 어찌보면 남들보다 늦게 가도 죽을만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평온한 삶을 사는 인간이다. 


그래도 극단에서만 이야기 할 자격이 생긴다고 하면, 그 무수한 중간에 있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자꾸 힘이 없어지고 사라지는 거니까. 중간일 수도 있고, 중간 이상일 수도, 중간 이하일 수도 있는 내 이야기를 남겨본다. 


아무튼 나는 남들보다 느리게 가는 사람이고, 그런 경향이 이상하게 지금 하는 박사과정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한달 뒤면 박사 4년차가 된다. 프랑스 대학원 입학에 대한 글이 아직도 내 브런치글 목록에 남아있는 걸 보면, 내가 그 뒤로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 4년차까지 되었다는 것은 나조차도 믿을 수 없다. 더 웃긴 건 지난 2달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아직 내 논문의 첫 단어조차도 써본 적이 없는 박사 3년차 인간(말종)이었다는 사실이다. 


글을 쓰기 전까지 계속 두려웠다.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내 문제 의식이 뚜렷하지 않아서 써봤자 글이 엉망진창일텐데, 이 많은 컨텐츠들을 어떻게 하나로 엮지 등등등 너무 많은 걱정들 때문에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장장 3년을 지지부진하게 끌어왔다. 근데 어쨌든 이번 8월이 끝나고 나면, 나는 4년차 박사 등록을 위한 커미티 심사를 받아야 하고, 그 심사를 받으려면 지금까지 써온 논문 초안을 제출해야 했다. 


그제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인간 마냥 부랴부랴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거지 같은 초안이라도 일단 데드라인에 맞춰서 쓰는게 중요했다. 하루종일 집에서 말그대로 칩거 생활을 하면서 읽고 쓰는 일만 했다. 이상하게도 창작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새벽을 꼬박 보내고 아침 8시가 되어야 겨우 잠이 들고, 오후 3시가 되어야 일어나는 올빼미 패턴으로 살았다. (올빼미는 참 좋겠어) 


그렇게 영혼이 어디 팔려나간 사람처럼 읽고 쓰기만 반복하다보니 거지 같은 글이라도 얼추 초안이 마련되었고, 드디어 오늘로서 커미티에 이를 송부했다. 근데 참 이상하게도, 이번 초안을 쓰는 그 짧은 2달 동안, 아 이 때를 위해서 내가 원기옥을 모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완결을 짓지 못하던 글들, 공중을 떠다니던 조각난 글들을 한데 묶어내는 일들을 4년차에 접어들어서야 드디어 하게 되었다. 어쩌면 이게 내게 맞는 속도인가 싶었다. 박사과정도 글쓰는 일의 경쟁 같은 면모가 있어서, 동기 중 누가 몇 챕터까지 썼대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 한 문장도 시작 못했는데. 선배가 지금쯤이면 챕터 2,3개 정도는 끝내야 한다고 그랬었는데. 


남들은 빨리 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머물러 있는 것 같을 때. 그런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서 차라리 이불 속으로, 게임 속으로 회피해버린 적이 꽤나 많다. 근데 지난 경험을 되짚어보고, 나란 인간이 느리게 갈지언정 10mm라도 가는 인간이라 정의하고 나니 오히려 일의 진척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들 잘하는 것만큼 꾸준히 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하던데, 일단 나는 잘하는 건 그른 것 같으니 꾸준히 하는 거라고 해봐야겠다 싶었다. 꾸준히 하는 것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완벽주의'에 대한 포기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완벽주의의 결말이 좋은 꼴을 못봤다. 과하게 완벽주의를 가지면 시작조차 못하거나 빨리 번아웃되어 나가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다. 꾸준히 하려면 어느정도 완벽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타협을 해야할 수 밖에 없다. 매일매일을 한다는 것은 완벽한 날과 불완벽한 날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일단 한다는 뜻이니까. 완벽주의가 너무 심해서 논문의 문장 하나조차 쓰질 못하던 나였는데, '완벽하게 한다'에서 '엉망이어도 꾸준히 한다'로 태도를 바꾸니 어쨌든 결과가 조금씩 조금씩 나왔다.


어차피 남들 따라서 그만한 속도로 가지도 못할 거고 그렇다고 완벽을 기하지도 못할건데, 그러면 나에게 남는 것은 엉망진창이더라도 일단 꾸준히 해보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경험상 그게 속도전이든 완벽전이든 결론적으로 롱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인 것 같긴하다. 아, 나의 속도와 능력에 한해서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