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ne Gray Aug 04. 2016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편지 3

사우리바자르에서 7시간 걸어서 촘롱 도착


어제 밤새도록 폭우가 오더니 오전에도 비가 그칠 줄 몰랐다. 그래서 아침부터 '진짜 우기의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기의 안나푸르나는 그야말로 혹한 훈련과 다름 아니었다. 빗속을 뚫고 진흙밭을 걸어나가는데 몸에서는 땀인지 비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많은 땀이 흐르고, 또 발밑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거머리떼들이 두꺼운 신발과 양말을 파고들어와 피를 빨아먹으려고 달려드는 등 산행에서의 악조건을 오늘 다 겪은 것 같았다. 오전 상황이 이랬다면, 오후부터는 날이 개고 해가 떠, 입고 있던 옷을 짐으로 만들어버렸다. '안나푸르나의 변덕이란...'이라고 혀를 차려는 순간 구름 사이로 안나푸르나 사우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숙소인 롯지에 도착해서도 안나푸르나 사우스와 마차푸차레를 볼 수 있었다. 이게 우기에 만나는 최고봉들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너무 힘들어서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는데, 이렇게 구름 사이로 자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힘을 내 다가갈 기운을 북돋아 주곤 한다. 너무 아득하고 거대해 보여서 감히 나 같은 존재는 다가갈 엄두도 못 내겠구나 싶었는데 어느샌가 이렇게 안나푸르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느려도 된다. 중간에 쉬었다가도 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내가 가는 방향이 옳은 것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한 걸음씩 다가서는 것이다.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그리운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가족들,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두 번째로는 나의 잘못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아는 일이든, 모르는 일이든 상관없이 그동안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이렇듯 떠오르는 상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 생각들에 집중하면서 산행을 했는데, 산행 중간쯤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이 모든 생각의 기쁨과 의미를 몽땅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 신발 안에서 꿈틀거리는 거머리를 보는 순간 나는 거의 모든 내 의지와 다짐들을 잊어버렸다. 그리고는 오직 거머리에 모든 신경과 생각을 빼앗겨버렸다. 겨우 거머리에 모든 생각과 의지를 빼앗겨버린 것이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평소에는 어떤가. 나는 평소에도 이런 거머리와 같은 하찮은 고민들에 온 신경을 빼앗겨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거머리를 발견하고 한 시간쯤 지나서였을까. 문득, 거머리에 정신이 팔려 산행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알면서도 겨우 거머리에 신경 쓰느라 그 의미를 음미하지 못하고 있다니. 그간에도 얼마나 많이 이와 비슷한 실수들을 저질렀을까. 내가 산을 내려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부터 아마 이런 거머리와 같은 것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지금을 회상해야겠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이 하찮은 거머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닌지, 그 하찮은 생각에 사로잡혀 발밑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안나푸르나에서 보낸 편지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