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인 Oct 19. 2022

까만 방


그의 방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벽이었다. 정확히는 침대 옆 머리맡에 위치한 한 면의 벽. 그리고 그곳에 쓰여 있는 짧은 글들. 아이보리 색 벽지 위로 까만 글자들이 이리저리 휘갈겨 쓰여 있었다. 마치 동굴 속의 벽화처럼. 그는 가슴속에 남았던 문장들, 귓가에 머물던 음성들, 눈앞에 어른거리던 장면들을 자신의 방 한 켠에 박제시켰다. 그곳은 그에게 커다란 일기장이었다.


방은 사람을 한없이 솔직해지게 만든다. 사회로부터 부여 받은 옷들을 하나씩 벗어 던져 본연의 맨몸을 마주하게 한다. 예의, 매너, 눈치, 긴장, 규율, 관계… 살기 위해 겹겹이 입어야 했던 무거운 옷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지고 두꺼운 미소가 흐르는 물에 씻겨 내려간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아무 표정 없이, 아무렇게나 있을 수 있는 곳. 그곳에서 그는 온종일 참아왔던 말들을 몸 밖으로 꺼내놓았다. 턱 끝까지 차올랐던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뿜어냈다. 말과 감정을 흘려 보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벽에 새겨 그것들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일부가 아닌 글자들을 보며 그것들과 눈을 맞췄다.



     살다 보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한다

     기다림이 친구여야 하겠지

     나는 지식도 내공도 없는데 무작정 기다린다고 올까

     머리 쓰지 말고

     하던 대로 생각대로 살다 보면 이루어지겠지

     분명을 믿으며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마음이 허해 헛웃음이 난다

     복권을 사야겠다


     양보는 힘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힘이 없는 사람의 양보는 굴복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예의를 지켜야 한다


     내 힘듦은 남의 몫이 아닌 내 몫이다


     왜 살아~

     그냥~

     살아~

     걱정돼 사는 게~

     무얼 하고 먹고 살까~

     희망이 안 보여~


     비가 내려야

     무지개를 볼 수 있다

     늘 있는 일은 아니다

     운이

     좋다면

     그 무지개를 보겠지


     넌 무얼 하고 있니

     나도 궁금하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멍청해진다

     가난해서 힘들고

     가난해서 아이큐가 떨어져 판단이 흐려지고

     계속 가난하게 살게 된다


     아이 캔 두 잇



빛이 들지 않는 곳. 볕이 닿지 않는 곳. 어둡고 습한 방에 새겨진 까만 글자들.


그에게 방은 자신을 지키는 요새였지만 동시에 어떤 이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섬이었다. 한 톨의 감정이 씨앗이 되어 온 집안을 집어 삼킬 수 있는 곳. 찰나의 충동이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곳. 누구도 그를 저지할 수 없는 곳.

   그곳에 혼자 있는 한 사람.


이따금 밤이 되면 그의 방을 상상하곤 했다. 밑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어둠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얇은 선, 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자칫 호흡이 엉키면 까딱하는 새에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그럼에도 애써 웃는 얼굴로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홀로 힘겹게 빛을 내고 있는 흐릿한 촛불 같은 그 사람이 보였다.



작가의 이전글 이야기 나무, 그 옆에 벤치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