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방에서 우영우나 생각한다
영우는 매 회 거의 빠짐없이 반듯한 직사각형 도시락 뚜껑을 열고, 재료가 가지런히 들어간 김밥의 오와 열을 맞춥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세 가지 장면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김밥의 줄을 맞추며 사건을 고민하고, 고래를 만나 실마리를 찾고, 법정을 나서며 어떻게 살 것인가 사유합니다. 그러니까 사유에 이르기 위해 질서를 바로잡는 것은 영우에게 필요 조건인 셈입니다.
사람은 흐트러지거나 혼란 없이 잘 정돈된 환경에서 편안함을 느낍니다. 본능이죠. 자본주의에서 본능을 확인하려면 돈이 모이는 곳을 보면 되는데, 한때 Oddly Satisfying Video(OSV)가 효율 좋은 마케팅 기법으로 유행했었습니다.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깔끔하고 정돈된 환경에서 특정 동작이 느린 속도로 반복되는 게 이상하게 만족감을 준다는 거였어요. 질서와 규칙은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위해 돈을 주고서라도 갖고 싶은 것입니다.
2주 전 수요일, 퇴근 후 친구와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습니다. 용산 이촌역 코앞 노다지 땅에 큰 공터를 점유한 이 박물관 2층에는 '사유의 방'이 있습니다. 파리에 간 전 세계 사람들이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에 모이듯이 한국의 모나리자를 만들어보자는 뜻으로 2021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관에 섞여 있던 반가사유상 두 점을 위해 따로 방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한쪽 다리를 반대쪽 무릎 위에 얹고 은은하게 미소 짓는 두 개의 불상은 한 손은 땅을 향해, 나머지 한 손은 뺨에 붙여 생각하는 사람을 떠오르게 합니다. 다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깊은 고뇌에 빠진 우리 모습 같다면, 반가사유상은 아득하고 즐거운 생각으로의 여행을 즐기는 미륵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몇 달 전부터 계속 그 미소를 보고 싶었지만 적당한 동행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어요. 물론 혼자 가도 돼요. 하지만 그럼 감동에 겨워 맞장구쳐줄 상대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아무나 손잡고 와서 친구를 방학 숙제 때문에 끌려온 초등학생처럼 만들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안정적이고, 질서와 시간의 힘에 감동할 것 같은 사람. 그리고 언제고 비집고 들어오는 혼란을 떨치기 위해 자주 사유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았어요.
운해를 뚫고 좁은 통로를 지나 우측으로 돌아서면 느닷없는 여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은은한 조명이 벽을 따라 내리는 낮은 명도의 크고 둥근 방을 두리번거리면 그 끝에 두 보살이 묘한 미소로 인간이 지었을 고뇌를 대신 짊어주고 있습니다. 다행히 일행은 오래고 두 미륵과 눈을 맞추고 불상의 등을 눈빛으로 보듬었습니다. 영혼을 갈아 넣은 작품은 천년을 간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고요 속에서 사유하는 두 미륵이 사는 원형 공간은 네모반듯한 도시락에 줄지어 누운 동그란 김밥처럼 평온하고 질서정연했습니다.
전 세계 누구든 국립중앙박물관에 오시면 사유의 방을 포함한 대부분의 전시를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사유의 방만 보려던 우리 계획은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무너졌습니다. 무더위에 이토록 넓고 시원하고 볼 게 많은 공짜 공간이라니. 무엇보다 인구밀도가 낮아요. 결론적으로 2시간 30분 넘게 어슬렁거리다가 문 닫기 직전, 쫓겨나듯이 박물관 밖으로 나왔습니다.
온 전시관을 들쑤시고 다니던 중 비단 위에 그린 어떤 그림을 보았습니다. 석가모니와 그 제자였던 열여섯 명의 나한이 그려진 그림이었어요. 마치 잔치 같은 모습 때문인지 장자의 혼돈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아는 그 혼돈이요. 카오스. 혼돈. 말 나온 김에 장자의 마지막 장에 쓰인 혼돈 이야기를 잠시 들려드릴까 합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세 임금이 살았습니다. 남쪽 바다의 임금은 숙, 북쪽 바다의 임금은 홀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의 임금이 바로 혼돈이었습니다. 숙과 홀은 가끔 혼돈의 왕국에 찾아와 이런저런 정세를 논하고 혼돈에 조언을 구했어요. 그때마다 혼돈은 의미 있는 해결책을 주고 두 임금을 극진히 대접해주었습니다. 숙과 홀은 혼돈에 보답하고 싶었어요.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냄새 맡을 수 있는데 혼돈은 구멍이 없어 답답할 것 같소. 우리가 구멍을 뚫어줍시다."
숙과 홀은 선물로 하루에 하나씩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주었습니다. 그렇게 7일째가 되는 날 혼돈은 죽고 말았습니다.
혼돈은 질서에 관한 이야기로 장자가 성행하던 당시 시대상을 반영해 혼란한 상태, 즉 무질서하거나 질서가 바로잡히기 전의 상태에 각자의 잣대를 들이대 억지 질서를 부여하려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교훈으로 해석되곤 합니다. 하지만 구멍 일곱 개가 다 뚫려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보고, 소리를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다가 죽어버린 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 싶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0화 '손잡기는 다음에'에서 한 남자(양정일)가 장애 여성(신혜영)을 성적으로 이용했다는 이유로 기소됩니다. 혜영은 정일이 제비 같은 새끼라는 걸 알고 있지만 자신은 정일을 사랑하므로 감옥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장애인한테도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질 자유는 있지 않겠냐는 영우의 반문이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지요.
어떤 감각은 깨어난 후 오히려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잘 사용하기 전까지 실수가 잦아 일상을 꾸리는 데 방해되거나 지장을 주기도 하고요. 심리상담을 받는 내담자들이 초반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르고 살았으면 편히 지나갔을 것을 알게 된 후 심경이 복잡해져 온 머리를 헤집고 생활을 들쑤시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게 없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란 한 사람을 더욱 다채롭고 입체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즐거운 여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새로 익힌 감각을 어설프게나마 다루게 된 후에는 몰랐던 때로 되돌아가고 싶은 경우가 드뭅니다. 나쁜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고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처럼요.
법무법인 한바다에서 다루는 사건이 다양해질수록 영우는 세상과 자기 사이에 놓인 모순에 혼란스러워합니다. 그 모습이 꼭 아프다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수명이 8만 4천 세가 되는 때에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을 교화하길 기다리는 미륵보살이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있는 모습이 반가사유상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에게 8만 4천 년 치의 번뇌가 쌓여야 그런 미소를 지을 수 있으려나요. 7개의 구멍을 다 막고 지내기에는 너무 긴 세월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