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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나무냄새

by 김태민

7월이 시작되자마자 연일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 한낮 체감기온은 39도를 기록했다. 한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카페에서 글을 쓴다.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고 점심을 먹으러 집에 돌아오는 일과를 반복하는 중이다. 창문을 전부 열어두고 나갔는데도 실내는 찜통이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 단열재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집이라 어쩔 수 없다. 그냥 불편함에 적응하고 산다. 주말에 반찬을 미리 만들어두길 잘했다. 날이 더우면 가스레인지를 사용하기 싫어진다. 밥공기와 반찬통을 들고 창가로 간다. 선풍기를 틀고 빠른 속도로 밥을 먹는다.


돼지고기를 넣은 가지조림이 맛있게 잘됐다. 어제 산 오이로 냉국을 만들까 하다 그만두고 어묵볶음을 먹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은행나무 이파리 끝이 까맣게 탔다. 땡볕에 나뭇잎이 바싹 마를 정도로 더운 날이다.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까지 마무리했다. 찬물로 씻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작은 방에 들어갔다.


문을 열었더니 코끝에 나무냄새가 맴돌았다. 높은 실내온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낡은 방문에서 잘 마른나무 냄새가 났다. 살아있는 나무가 아니라 오래된 가구에서 나는 목재의 향이다. 어린 시절 살았던 덕천마을 상가 2층집이 떠올랐다. 기억은 바다에서 강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순식간에 세월을 거슬러 올라갔다.


IMF를 맞고 재봉공장이 나간 자리에 우리 가족이 들어가 살았다. 잠깐 지내다 나올 줄 알았는데 거기서 4년이나 살았다.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 낡은 상가는 방이 없었다. 그래서 아빠는 나무합판을 목공소에서 사다가 벽을 만들었다. 그 위에 하얀 벽지를 여러 겹으로 발라서 안방과 내방을 나눴다.


늦은 밤 담을 타 넘는 도둑 같은 사춘기를 그 방에서 보냈다. 코를 가까이 댔다. 잊고 지냈던 그 집의 냄새와 많이 닮아서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무냄새를 좋아했다. 오래된 목재가구에서 나는 냄새를 맡으면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벽면을 빈틈없이 채운 나무책장은 아빠가 산 책으로 가득했다.


두꺼운 책을 잔뜩 꺼내서 블록처럼 쌓고 놀았다. 안방에 있던 원목 피아노는 외삼촌이 결혼 선물로 준 엄마의 보물 1호였다. 호수와 배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는 피아노 덮개를 열면 잘 마른나무냄새가 났다. 연필 끝에서 나는 냄새보다 더 깊고 진한 나무냄새였다.


이사를 다니면서 책장과 피아노는 사라졌다. 진한 갈색빛이 도는 원목식탁과 의자도 지금은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주머니가 가벼워지면서 세간살이도 간소해졌다. 악기점에 피아노를 팔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는 울었다. 정든 삶과 잠시 거리 두기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날 우리 가족은 끝없는 겨울이 시작되는 분기점을 지났다. 익숙했던 것들은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 불편에 적응하고 현실에 순응하는 사이에 세월이 지나버렸다. 추억이 깃든 살림살이를 하나 둘 처분하면서 부모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제 나도 그 마음을 알 만한 나이가 됐다.


모르고 지나쳤던 감정이나 기억을 이렇게 우연한 계기로 돌아볼 때 세월을 실감한다. 옷걸이와 옷가지를 넣어둔 수납장이 가득한 작은 방은 원래 내방이었다. 중학생 시절 시간표와 포스터를 붙여놨던 테이프 자국이 문 뒤편에 여전히 남아있다.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다.


처음 안양 8동으로 이사 온날 방에 짐을 풀다 말고 나무 문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그때 속으로 더는 이사 다닐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 후로 쭉 명학에 살았으므로 내 바람은 이뤄졌다. 여기저기를 살펴보다 문턱에 눈길이 닿았다. 나무로 만든 문지방은 낡아서 군데군데 변색이 됐다.


옛날 어른들은 문지방을 밟지 못하게 했다. 그 생각이 갑자기 떠올라서 슬리퍼 신은 발로 문지방을 밟고 혼자 웃었다. 옛날에는 하지 말라는 게 참 많았는데 더는 그런 말 들을 일 없는 어른이 됐다. 흔한 잔소리마저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오래된 추억 속을 헤집고 돌아왔다. 그리운 나무냄새가 여전히 코끝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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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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