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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푸른 나무가 되고 싶었다

by 김태민

날이 좋아서 산책을 했다. 발걸음 가는 대로 걷다 등산로 입구까지 왔다. 산을 탈 생각은 없어서 주변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만 걸어 올라갔다. 전나무와 소나무가 제법 빽빽하게 자리 잡은 곳이라 사방에서 솔향이 났다. 맘이 편안해졌다. 숲은 마음이 쉬는 곳이다.


푸른 숲 속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 취향은 때때로 변하지만 습성은 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타고난 건지 자라는 동안 내면에 자리 잡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로다. 마음이 지친다 싶으면 집 밖으로 나와서 숲을 찾았다. 집에서 산림욕장까지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상록마을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동네였다. 산동네라는 말보다 숲동네가 더 어울리는 마을이었다. 명학바위 지나 하얀 수피를 드러낸 자작나무 아래서 쉬다 맘이 내키면 숲 속 상록쉼터까지 걸어갔다. 가만히 서서 우거진 잎사귀 틈새로 빛나는 햇살을 구경했다.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햇살이 손등에 보석 같은 무늬를 만들었다. 바람이 불면 상록숲은 파도소리를 냈다. 호흡하듯이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백색소음에 고단한 마음을 씻어냈다. 종종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유는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지금은 이름표를 잃어버린 감정만 남았다. 꼭 방치된 화분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물을 준 적도 없는데 비를 맞아가며 꿋꿋하게 살아남은 화분 같은 감정이다.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았다. 막연하다 못해 터무니없는 망상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무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모습이 좋았다. 사시사철 같은 자리에 있는 나무가 부러웠다. 나는 항상 불안했다.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가야 할 길은 멀고 해야 할 일들은 두려웠다. 삶은 머리를 싸매도 도통 답을 알 수 없는 3점짜리 수리영역 문제 같았다. 그래서 외면하고 싶었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이나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을 남몰래 가슴속 주머니에 담았다. 입을 닫고 살면 마음의 문도 닫힌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문은 열려있었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살았다. 불안함이나 공허함이 이따금씩 속에서 짤랑거리는 마찰음을 내면 입구를 단단히 조여 맸다.


뒤늦게 주머니를 펼쳐보면 검게 변한 납덩이들이 가득했다. 흐르는 시간 속에 던져 넣었지만 가라앉을 뿐 녹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지난 과거는 한 번씩 멋대로 날아들어와 일상을 깨뜨리는 돌멩이처럼 날카로웠다. 그래서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혼자 산이나 숲을 찾았다.


푸른 이파리를 달고 하얀 햇살을 맞으며 서있는 나무를 보며 괴로움을 잊었다. 하늘을 향해 쭉 뻗은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나무처럼 무던해지고 싶었다. 단단한 옹이를 품은 떡갈나무 같은 마음을 갖고 싶었다. 밑도 끝도 없는 바람에 불과했지만 간절함은 가볍지 않았다.


내면 깊이 뿌리를 내리더니 어느새 제법 든든한 지지대로 변했다.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날들이 퇴적되면서 만든 지층은 경험이 됐다. 바람처럼 몰려오는 불안은 바짝 마른 가지를 쉴 새 없이 흔들었지만 땅 속 깊은 곳의 뿌리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있다.


잘 살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는 계절을 보내고 세월을 맞는다. 자기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고 서있는 나무는 꺾이지 않는다. 봄이 지나면 고운 꽃은 지고 가을이 끝나면 무성한 이파리는 사라진다.


뼈만 남은 몸으로 긴 겨울을 보내고 매번 살아남아 봄을 맞이한다. 잊지 않고 늘 다시 꽃을 피운다. 나도 그런 나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인지 가을인지도 모를 혼잡한 계절 속에서 길을 찾고 싶었다. 살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버티다 보면 지나가고 견디다 보면 흘러간다.


눈처럼 쌓인 괴로움이나 외로움을 쉽게 털어낼 수는 없지만 해가 구름 밖으로 나오면 천천히 녹는다. 아픔에 무던해질 수는 없겠지만 종류를 막론하고 고통에 끝이 있다는 사실은 안다. 나무는 세찬 빗속에서 자란다. 사람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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