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 출간 전 연재 (2)
2009년 미국 디즈니월드 인턴십은 내 삶의 첫 터닝 포인트였다. 그 당시엔 영어로 소통이 된다는 게 마냥 즐겁고 신기한, 지금 되돌아보면 영락없는 영어 초보였다. 함께 트레이닝을 받았던 위스콘신 출신의 미국인 친구 넬슨과 곧 친해졌는데 그는 내가 정직한 한국식 발음으로 "Let’s go to Walmart"라고 말할 때마다 놀렸다.
"It’s WALMART!"
우리 같은 해외 대학생들은 셔틀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미국 대학생들은 대부분 차가 있었기 때문에 남동생 같았던 넬슨의 차를 매일 얻어 타고 함께 월마트에 가곤 했다. 그는 가끔 자신의 다른 미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 나를 초대해 주었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넬슨하고 둘이서만 대화를 할 때는 우리 둘 사이의 맥락 안에서 그가 나를 배려해 천천히 말해주고 기다려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가 쉬웠는데 여러 명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니 다들 어찌나 슬랭이 섞인 말을 속사포처럼 빠르게 하는지. 지금 생각하니 외국인이었던 나는 잘 모르는 어떤 문화적인 맥락들을 전제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해하는데 한 박자가 느리니 끼어들어 한마디 해보기는 커녕 제때 대답을 하거나 정확히 무슨 말이 오고 가는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난 그때만 해도 내향인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너무 많이 되어 피곤했다. 죽 밖에 소화를 못 시키는 마당에 고기 뷔페에 간 느낌이랄까.
트레이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근무를 하게 되며 넬슨과는 스케줄이 엇갈렸지만 곧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이 친구들의 국적은 멕시코, 콜롬비아, 중국, 싱가폴로 다양했는데 기본적으로 나보다는 영어를 훨씬 잘하거나 적어도 조금은 더 유창했다. 풍부한 단어와 표현력을 갖췄으면서도 원어민보다는 알아듣기 쉬운 속도의 영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흡수하고 따라 하면서 영어가 쭉쭉 늘었다. 그동안 무슨 말이 하고 싶어도 혹시 틀릴까 봐 머릿속에서 곱씹어서 내보내느라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모두가 자신만의 억양으로 실수를 하든 말든 거침없이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에 놓이니 그런 소심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기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단계였던 것 같다. 자전거를 타기 전에 보조바퀴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각 나라 특유의 억양이 묻어 있는 영어를 듣는 게 너무너무 신선했다.
혹시 내 발음이나 억양이 엉망이 되진 않았느냐고? 비원어민 친구들과 6개월간 붙어 지내며 내 말투에 지대한 변화가 생겼다면, 난 이미 그전에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약 15년간 귀에 꽂고 지냈던 미국 ABC방송 말투가 되어 있었어야 한다. 그동안의 나의 꾸준한 영어 여정의 몇 번의 굵직한 스텝업, 다시 말해 성장 포인트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앞서 언급한 대로 미드에 빠져서 딕테이션을 하고 난 뒤였고, 두 번째는 방금 언급한 다국적 친구들과의 교류였다.
<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 - 보조바퀴를 달고 씽씽 달리는 기분
4월 중 전자책으로 출간 예정인 <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 연재 두 번째입니다.
성인영어 티칭을 해오다 보니 많은 분들께서 원어민 영어에 대해서 상당한 mixed feeling을 갖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유튜브만 봐도 유명인들의 영어 발음, 억양을 비교하며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거나 동경심을 심어주는 콘텐츠가 많잖아요? 또 "원어민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라고 하며 실제 원어민들이 쓰는 표현들을 알려주기도 하고요. 물론 제대로 된 표현을 배워서 써먹을 수 있다면 좋죠! 그러나 영어라는 언어를 사용한 소통의 즐거움이나 조금 서툴더라도 나만의 문장을 만들어보는 재미를 느껴보기도 전에 '진짜 원어민 표현, 발음, 억양'을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게 맞는 표현인지, 틀리거나 발음 때문에 창피를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하다가 입을 다물게 되는 게 한국 영어 초심자들의 현실이기도 해요. 인터넷에 수도 없이 뜨는 광고들은 'OO만 하면 곧 입이 트인다'는 식이니 뭔가 마음먹고 그 방법대로만 하면 될 것도 같죠. 즉 최대한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빡세게' 공부해서 나도 좀 유창하게 말하고 싶은데 언어라는 게 그렇게 단기간에 습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조금 하다 보면 충만했던 의지는 슬슬 사라지고 흐지부지되어 버려요.
서점에 가면 영어 공부법을 다루거나 영어를 가르쳐주는 책들은 넘쳐나죠. 굳이 서점까지 가지 않아도 유튜브에도 좋은 콘텐츠가 많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굳이 나까지 영어에 대한 이야기를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성인이 되어서 영어회화를 시작하고 지금은 영어가 삶의 일부가 된 한 사람으로서 솔직한 과정과 생각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에 한편 한편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다음번에는 세 번째 연재글로 찾아뵐게요 :)
목차
Prologue
1.
English and Me
나의 영어 성장기
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
열정에 기름 붓기
딕테이션 A-Z
나와 너의 억양이 다르기 때문에
영어로 소리치라고?
무전기의 악몽
보조바퀴를 달고 씽씽 달리는 기분
일상을 영어로 채우는 방법
챌린지의 연속이었던 첫 크루즈
언어의 4요소, 골고루 섭취하기
내 영어만 문제인 걸까?
2.
Just keep swimming
당신의 영어 성장을 응원합니다
기초가 없는 외향인의 영어
효과가 있을지 미리 고민하지 말고
그건 다시 태어나거나 머리에 칩을 심으셔야 해요
‘하고 싶어’와 ‘원하다’의 간극
당신의 문제는 리스닝이 아닐지도 모른다
꾸준함은 힘이 세다
타고난 언어 재능이 있다 해도
내향인이지만 유창하고 싶어
원어민 영어라는 것
아빠도 못하면서
캐리처럼 말하고 싶어서
초급자들을 위한 영어 성장 레시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의 속도대로 성장하기
영어 이름을 만들기 전에
3.
Keep on pushing the boundaries
끝이 없는 여정의 즐거움
성공한 사람들의 영어 공부
좋은 코치가 되면 돼
통번역의 길을 걸어볼까
북클럽의 추억
가장 효과적인 인풋은 리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성장하고 싶다면
프리랜서이고 임산부입니다
Epi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