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 출간 전 연재 (3)
“강사님은 영화 보실 때 자막 없이 보시죠?”하고 수강생님들이 질문할 때가 가끔 있다. “자막이 있으면 있는 대로 보고 없으면 없는 대로 봐요” 이렇게 대답하면 “자막이 없어도 다 들리시죠?”하고 다시 물어보신다. “들리기야 다 들리죠. 그런데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고 그냥 볼 때도 많아요”라고 대답하면 고개를 살짝 갸웃하신다.
난 사실 한국어로 된 영화도 어려울 때가 많다. 작년에 영화관에서 <헌트>를 봤는데 내용을 미리 알고 본 것도 아니었고 배경지식도 부족해서 극 중 대사에 의존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날따라 내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건지 그 영화가 유난히 대사 전달이 안 되는 건지 아무튼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정치, 경제, 금융, 역사 등의 배경지식이 있어야 이해가 빠른 영화들의 경우는 특별히 따라잡는데 애를 많이 먹는다. 극 중 인물이 사투리를 쓰는 경우는 더하다. 그냥 맥락으로 대충 알아들을 때도 많다. (나만 그런가?)
그렇다고 이게 나의 한국어 리스닝 문제냐? 그건 아니다. 일례로 나는 여태껏 한국의 직장문화를 경험해보지 못한 데다가 넷플릭스를 제외하고는 텔레비전도 일절 보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의 사내문화를 간접 체험할 기회도 없다. 회식을 해본 적도 없고 윗사람이 주는 술을 받아본 적도 없다. 술은 그냥 각자 따라 마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은 어떤 어르신과 처음으로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라 진땀을 뺐다. 또 외국인 남편이 영화에서 제사상 문화를 보고 신기해하며 질문을 하는데 뭘 알아야 대답을 해줄 것이 아닌가. “네가 아는 만큼만 나도 알아”라는 말 밖에 해줄 말이 없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주제에는 심취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편이다. 꽂히는 분야가 아니면 책도 잘 읽지 않고 굳이 검색하거나 찾아내서 공부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내가 한국 영화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이해도가 떨어진다면 그건 리스닝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는 것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니 해결법은 간단하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칼럼이나 책을 두루두루 읽고, 다큐멘터리도 찾아서 보고, 내가 아는 것을 바탕으로 글도 써보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도 해봐야 한다. 관련 주제에 대한 단어를 외우거나 그 영화를 쉐도잉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의외로 중고급 레벨의 수강생님들이 자신의 듣기 능력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신다.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단어로 유추하는 거지 들은 것을 정확하게 다시 말하려고 하면 못하겠어요. 리스닝 실력을 더 키워야 할 것 같아요”
이런 경우 꼭 리스닝 실력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다양한 문장들을 여러 가지 맥락과 스토리 안에서 접하고, 스스로 이해한 내용을 자신의 입을 통해 직접 말해보는 연습이 덜 되어서라는 처방을 내리고 싶다.
또 한 가지. 우리는 모국어를 들을 때도 한 문장 한 문장 정확하게 듣지 않으며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또 나처럼 특정 주제에 대한 이해가 좀 느리다고 해서 일상에서 소통하는데 불편을 겪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독 영어에 있어서는 정확하게 다 알아들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너그럽게 공부해도 괜찮다. ‘필수 원어민 표현 리스트’ 같은 것에 집착하지 말자. 아무리 유용하고 좋은 표현을 배운다 해도 올바른 맥락에서 스스로 사용할 줄 모르면 죽은 공부나 다름없다.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언어의 네 가지 요소를 고루고루 발전시키다 보면 영어도 한국어처럼 편안하게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온다. 단, 그날은 어떤 비법으로 단기간에 찾아오지 않으며, 긴긴 겨울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 일찍 밝아오듯 매일의 꾸준함으로 스며들듯이 맞이하게 된다.
목차
Prologue
1.
English and Me
나의 영어 성장기
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
열정에 기름 붓기
딕테이션 A-Z
나와 너의 억양이 다르기 때문에
영어로 소리치라고?
무전기의 악몽
보조바퀴를 달고 씽씽 달리는 기분
일상을 영어로 채우는 방법
챌린지의 연속이었던 첫 크루즈
언어의 4요소, 골고루 섭취하기
내 영어만 문제인 걸까?
2.
Just keep swimming
당신의 영어 성장을 응원합니다
기초가 없는 외향인의 영어
효과가 있을지 미리 고민하지 말고
그건 다시 태어나거나 머리에 칩을 심으셔야 해요
‘하고 싶어’와 ‘원하다’의 간극
당신의 문제는 리스닝이 아닐지도 모른다
꾸준함은 힘이 세다
타고난 언어 재능이 있다 해도
내향인이지만 유창하고 싶어
원어민 영어라는 것
아빠도 못하면서
캐리처럼 말하고 싶어서
초급자들을 위한 영어 성장 레시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의 속도대로 성장하기
영어 이름을 만들기 전에
3.
Keep on pushing the boundaries
끝이 없는 여정의 즐거움
성공한 사람들의 영어 공부
좋은 코치가 되면 돼
통번역의 길을 걸어볼까
북클럽의 추억
가장 효과적인 인풋은 리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성장하고 싶다면
프리랜서이고 임산부입니다
Epi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