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 출간 전 연재 (4)
가끔씩 그룹 수업에 지친 나머지 비싼 가격을 무릅쓰고 일대일 수업을 찾아왔다는 분들을 만난다. 보통 성격이 내성적이신 경우가 많다. 나도 그 마음 이해한다. 한 마디 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E(외향인)들 사이에서 치이다가 지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강사로서 좀 난감할 때가 있다. 나는 어떻게든 말을 이끌어내 보려고 노력하는데도 무뚝뚝하게 시종 단답형으로만 대답하시는 분께서 “전 교포 수준으로 회화를 하는 게 목표예요” 하고 원대한 목표를 내비치실 때이다. 영어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어떤 요령을 적용해서 능숙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심지어 모국어도 유려하게 잘 말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갈고닦는 과정이 필요한데 성인이 되어서 외국어를 잘하고 싶다면 자신의 한계를 깨려고 하는 최소한의 노력은 필수적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한계’란 소극적인 성격, 틀리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구린 발음에 대한 쪽팔림, 필요이상의 자기 검열 등이 있겠지만 사실 극복하고 나면 별게 아닐 때가 많다.
나로 말하자면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여는 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끼를 발휘해야 하는 무대 MC 체질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다행히도 그동안은 나에게 그런 챌린지가 주어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크루즈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몇 백 명이 넘는 VIP멤버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아야 하는 순간이 왔다. 커다란 라운지에서 모두가 식전주를 즐기고 있는 중에 전날 극장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했던 싱어송라이터 지미가 나에게 다가와 혹시 원한다면 지금 라운지에서 몇 곡을 연주해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도 전날 공연을 보고 팬이 되어버렸을 정도였기 때문에 내 라운지에서 그가 프라이빗 깜짝 공연을 해준다니 꿈만 같았다. 단박에 그에게 무대를 준비해 주겠다고 하고 나니 그 깜짝 공연을 멋지게 소개하는 건 내 몫이 되어있었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담감이 몰려왔다. 딱히 영어라서가 아니었다. 한국어라고 상상해도 어색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괜히 나의 서투른 소개로 분위기만 망치는 건 아닌지 부담스럽기가 그지없었지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다들 저녁 식사를 하러 일어서기 전에 어서 깜짝 공연을 알려야 했다. 울며 겨자먹기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이크를 집어 들고 스테이지에 섰다. 심장이 정신없이 뛰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라운지 전체에 울릴 것만 같았다. 눈치 빠른 손님들이 대화를 멈추고 나를 주목했다.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지만 내 입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아아, 여러분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나요? 오늘 사실 여러분을 위한 깜짝 선물이 있는데요, 어제 대극장에서 공연을 했던 싱어송라이터 지미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다이아몬드 멤버를 위한 특별 공연을 해준다고 하네요! 저라면 아마 저녁식사에 늦더라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지미! 준비됐나요?”
크루즈 디렉터처럼 청중을 휘어잡는 유려한 말솜씨로 지미를 더 우렁차게 소개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아쉬웠지만 이미 손님들이 지미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환호성을 질러준 덕분에 분위기가 한껏 업 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내려놓고 돌아오는 내게 몇몇 게스트가 엄지를 척척 들어 올리며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순간 다음번에 다시 기회가 온다면 피하지 않고 더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은근히 지미가 다음 주에 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정말이지 그 무대에 서야 한다는 사실이 나에겐 진심으로 숨고 싶은, 두렵고 어려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잘 안다. 내향인들의 두려움을. 하지만 용기를 내서 그 두려움에 정면으로 부딪혀 눈 딱 감고 해냈을 때의 성취감이 얼마나 큰 지도 알기 때문에 난 수줍은 수강생님들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영어 유창하게 잘하고 싶으시죠? 먼저 한국어를 잘하고 계시는지 생각해 보세요. 말을 흐리거나 얼버무리는 습관이 있으시다든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에서만 맴맴 돌다가 타이밍을 놓친다든지, 평소에 말수가 적으셔서 단답형으로만 대답을 하시는 편인지요. 한국어를 쓰시는 습관이 영어라고 해서 바뀌지 않아요. 제가 최대한 편안하게, 기다려드리며 수업을 진행해 드릴 테니 우리 함께 노력해 봐요. 처음엔 어색하고 두려우시겠지만 제가 도와 드릴게요. 대신 제 앞에서 만큼은 최선을 다해주세요”
목차
Prologue
1.
English and Me
나의 영어 성장기
내가 영어를 다시 만났을 때
열정에 기름 붓기
딕테이션 A-Z
나와 너의 억양이 다르기 때문에
영어로 소리치라고?
무전기의 악몽
보조바퀴를 달고 씽씽 달리는 기분
일상을 영어로 채우는 방법
챌린지의 연속이었던 첫 크루즈
언어의 4요소, 골고루 섭취하기
내 영어만 문제인 걸까?
2.
Just keep swimming
당신의 영어 성장을 응원합니다
기초가 없는 외향인의 영어
효과가 있을지 미리 고민하지 말고
그건 다시 태어나거나 머리에 칩을 심으셔야 해요
‘하고 싶어’와 ‘원하다’의 간극
당신의 문제는 리스닝이 아닐지도 모른다
꾸준함은 힘이 세다
타고난 언어 재능이 있다 해도
내향인이지만 유창하고 싶어
원어민 영어라는 것
아빠도 못하면서
캐리처럼 말하고 싶어서
초급자들을 위한 영어 성장 레시피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의 속도대로 성장하기
영어 이름을 만들기 전에
3.
Keep on pushing the boundaries
끝이 없는 여정의 즐거움
성공한 사람들의 영어 공부
좋은 코치가 되면 돼
통번역의 길을 걸어볼까
북클럽의 추억
가장 효과적인 인풋은 리딩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성장하고 싶다면
프리랜서이고 임산부입니다
Epi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