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와 쉼표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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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일생을 결정짓는 순간이란 존재할까.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보기 전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주제다. 상영 시간이 끝나간다는 게 아쉬운 게 오랜만일 정도로 좋은 영화였다. 자전적 이야기란 게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다니. 여든살을 앞둔 노인의 젊은 시절을 재구성한 필름이, 조금만 더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는 게 놀라웠고.
어린 새미는 극장에서 세실 B.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를 부모님과 함께 보고 영화에 그야말로 흠뻑 빠져든다. <파벨만스>는 이 시점으로부터 시작된 새미-스필버그의 재현-가 쫓는 영화로의 여정을 충실히 그려낸다. 어린 시절 겪은 하나의 경험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셈이다.
좋은 영화는 2시간 남짓의 경험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여운 속에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지켜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내게도 저런 순간이 있었을까.’
물론 나를 스필버그같은 거장의 발자취에 견줘볼 순 없다. 나이로 보나, 깊이로 보나, 어떻게 해도 비교는 안되지. 그래도 지금까지 걸어온 나름의 여정을 통해 생각해볼 순 있잖아.
비슷한 순간이 내게도 있었다. 새미가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와 비슷한 나이였던 다섯 살 때였다. 나는 네살이 채 되기 전에 한글을 일찍이 뗐다. 그리고 활자에 대한 탐닉이 시작됐다. 집에 있는 동화 전집 시리즈는 내용을 달달 외울 정도로 봤다. 아직도 몇몇 동화는 제목, 내용, 삽화를 만들어낸 방식까지 생생히 기억날 정도다. 사촌형들이 10년쯤 전에 읽었던 계몽사의 백과사전류 전집도 다섯살 무렵엔 이미 정복한 상태였다.
교육열은 특출났지만 벌이는 지극히 평범했던 우리 부모로선 내 욕망을 해결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렇게 다섯살의 어느 겨울날, 부모님은 나를 차에 태워 어딘가로 향했다. 도서관이라는 장소였다. 인천 부평구에 있던 북구도서관, 그리고 구청 어딘가에 있던 자그마한 도서자료실. 두 군데의 도서관에 내 이름으로 대출 카드를 만들었다. 책이 가득한 그 공간들이 어린 마음에는 ‘바벨의 도서관’만큼이나 웅장하게 느껴졌을거다. 한번에 책을 다섯권이나 빌릴 수 있었다. 와우. 2주라는 대출기한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가서 바로 다 읽을건데 뭐. 엄마, 아빠, 그리고 내 도서카드를 사용하면 두 군데의 도서관에서 일주일에 30권의 책을 빌릴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빌려왔던 첫번째 책 무더기,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집어든 한 권의 책이 생각난다. <시튼 동물기>. 물론 원전은 아니었고 아이들 용으로 축약된 다이제스트 서적이었겠지. 그래도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그 책을 펼쳐 읽으며 오던 길은 아직도 생생하다. 26년 전인데도 말이다. 꽉찬 행복감이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부모님과 함께 도서관에 가는 게 너무나 당연했다. 대출 권수가 모자라 어린이도서관에 꼭 읽고싶은 책을 두고 나올때의 아쉬움, 그 다음주에 찾아가 그 책을 무사히 우리 집에 데리고 왔을 때의 안도감, 모두 근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고선 주말마다 친구들을 끌고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쥬니어 네이버에 ‘책벌레 독서클럽’도 만들었다. 아이들 사이에 독서 문화를 장려하고 하는 큰 꿈으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냥 나만 서평을 몇개 올리는 수준에서 끝났던 것 같다. 스필버그는 동네 친구들을 이끌고 영화도 만들었던데, 내 능력이 부족했던 거겠지 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 , 시선의 높이가 조정되는 컷을 보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단순히 너무 좋은 영화를 봐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는데, 조금 다른 생각이 드네. 뭐냐면.. <파벨만스>의 새미는 부침을 겪고 카메라를 중간에 놓지만, 결국 처음의 길로 돌아가거든. 근데 나는 어떤 길을 걷고있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첫번째 분기점이 도서관이었던 건 맞는 것 같은데, 지금의 내 길은 거기서 몇번 더 꺾인 것 같거든. 일단 난 더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활자는 하루종일 빨아들이지만 종이책을 손에 쥐는 건 거의 없는 일이다. 입시공부에 매진하기 시작한 중학시절 이후로는 늘 그랬고, 잠시 군대에 있을 때 돌아가려다가, 지금은 아예 책과 멀어져버렸다.
물론 지금의 내가 서있는 지점은, 나라는 사람은, 그 유년기의 분기점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겠지. 하지만 문득 생각이 드는거다. 타인의 집요한 여정을 넋놓고 보다가 잊고 살던 그 순간들이 파스스 떠올라버린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