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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무릎이 아프다.
오른쪽 다리를 다쳤던 건 지금으로부터 8년하고도 5개월 전, 논산 육군훈련소에서였다. 사격을 하기 위해 파놓은 참호의 일종인 ‘사로’에 빠졌다. 철뚜껑으로 덮여있어야할 사로 위에 검은 천막뿐이었다. 함정이라도 파놓은 양 2미터 가량을 낙하했고, 한 발로 착지를 하면서 부상을 입었다. 비명을 지르고,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가까스로 함정에서 탈출했다. 걸을 수 없었다. 의무대로 실려갔고, 인대 염좌 진단과 함께 반깁스를 하게됐다.
야간점호를 하는 시간이 다 돼서, 목발을 짚으며 분대로 복귀했다. 그런데 분대원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걱정과 위로보다는 조롱에 가까웠다. 얼마나 해야 하냐며, 근육이 놀랐을 뿐인데 그렇까지 해야하냐며. 전우애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냉랭한 적개심을 내뿜을거라곤 사실 생각도 못했는데.
그때부터 지옥이 펼쳐졌다. 훈련을 열외하는 나에 대해 따가운 눈초리가 쏟아졌고, 린치에 가까운 집단괴롭힘이 이어졌다. 나는 꾀병 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믿지 않았다. 훈련소 초반부터 성향이 다른 분대원들이 많아 이미 서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는데, 그들은 마치 좋은 기회라도 찾은 것처럼 날 옭아매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미쳐가는 기분이었다. 그당시 내가 쓴 손편지를 받은 사람들이라면, 내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휘갈긴 고충들이 어렴풋이나마 기억날 지도 모르겠다.
괴롭힘을 주도한 건 경찰행정학과에 재학중인 A훈련병이었다. 김대중이 빨갱이고, 박정희를 존경한다던 그녀석은 내가 몇차례 다른 정치성향을 드러내니 집요하게 날 생채기냈다. 최악의 인물이었지만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사람은 B훈련병이었다. B는 내 친구였다. 나랑 같은 대학, 같은 학과로 1년 선배였다. 1년동안 과내 밴드 동아리를 같이했고, 매주 함께하는 술자리가 있었고, 합주를 하며 같은 무대에 선 적도 있다. 심지어 논산 훈련소에서 일부러 나란히 줄을 섰고, 같은 분대로 배정을 받았다. 친구라 생각했던 사람이 앞장서서 나를 쓰레기로 만들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래서 더 잔혹한 현실이었다.
나는 슬슬 4주간의 훈련조차 제대로 이수하기 어려울거 같다는 절망감에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견디다못해 종이에 장문의 고발문을 썼다. 아, SOS구조서한이라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걸 투척했어야하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난 그걸 못냈다. 주모자 중 한명이 눈치를 챘는지, 조금은 다른 태도로 대하더라. 일을 키워야할 이유는 백가지도 넘었지만... 그냥 한숨 한번 쉬고 드잡이를 포기했다. 그냥 그들을 적당히 용서했다.
그리고 난 굉장히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정상인코스프레를 하기로 했다. 남은 훈련일정에 추가로 따라갔다. 각개전투 모의훈련을 한답시고 포복으로 기어갔다. 20km 행군도 했다. 매일아침 3km 구보도 했다. 간호사로 일하던 옆소대 동기가 “너 미쳤냐”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면 좀 적당히 할 줄 알았는데. “너 무릎은 아프고싶을 때만 아프냐”는 답이 돌아왔다. 성질머리같아선 주먹을 그녀석의 턱주가리에 꽂았어야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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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오면 시리고, 수시로 삐걱거리고, 예전같이 힘도 잘 안들어간다. 사실 그때 그러면 안되는거였다. 깁스달고 뛰어선 안됐는데, 그게 괜찮은거라며 그냥 넘겨도 안되는건데. 뭐라도 했어야하는데. 가만히 당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는데. D.P 시즌1을 보고선 많이 울었다. 시즌2는 자꾸 욕이 나왔다. 근데 나라고 별 수는 없겠더라고. 그 좌절감이란 ..
그래서겠지? 아직 내 무릎이 아픈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