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2> 리뷰
그리스 비극의 구조를 차용한 <조커2>, 비극을 노래하다
이번 영화의 구성은 호불호가 갈리는 구성이다. 서사가 진행되다가 아서 플랙이 고민하는 부분에서 뮤지컬 형식을 등장하고, 또다시 서사가 진행되다가 뮤지컬 형식이 등장한다. 뮤지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스토리를 따라가는 입장에서 영화에 집중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아마, 이 부분이 많은 관객들에게 호불호로 갈리는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감독이 왜 이러한 형식을 취했는지 고민해본다면 나름의 메시지를 살펴볼 수 있다. <조커2>는 형식적 측면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으로 바라본다면 의미가 있는 부분이 발견될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비극을 즐겨 보았다. 비극을 관람하며 어떤 이는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또 어떤 이는 예배에 참여하는 마음가졌을 것이다. 비극의 들머리(Prologos)-등장합창(Parodos)-삽화1(Epeisodion)-마당합창1(Stasimon)- 삽화2(Epeisodion)-마당합창2(Stasimon)-삽화3(Epeisodion)-마당합창3(Stasimon)-삽화4(Epeisodion)-나가기(Exodos)로 구성된다. 비극은 이야기가 시작되고 작가의 생각 혹은 주인공의 속마음을 합창으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결국, 그리스 비극의 형식과 <조커2>의 형식은 매우 유사하다. 아서 플랙의 마음, 감독의 생각을 뮤지컬 형식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감독이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차용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 비극은 민중이 관람을 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명예로운 귀족 혹은 상위 계급의 주인공은 운명과 대결을 한다. 운명은 정해진 미래이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투쟁을 계속한다. 그러나, 언제나 승리는 운명의 것이다. 운명에게 패배하여 갈기갈기 찢어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바라보며 민중은 카타르시스, 희열을 느끼며 열광한다. <조커2>에서는 비극의 주제를 변주하였다. 사회의 부조리로 인해 소외된 아서 플랙이 자신을 조커로 열광하는 사회적 집단 광기와 대결을 펼치다 혹독하고 불쾌할 정도로 추락하며 패배하는 내용을 보여준다. 아서 플랙의 추락에서 우리는 그 어떤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하고 허무하며 불쾌감을 느낄 뿐이다. 사회의 부조리함과 잔혹성이 현실적으로 얼마만큼 냉혹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담시 감옥에서 법정까지, 사회에 패배한 아서 플랙
<조커>에서 아서 플랙은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고 <조커2>에서 감옥에 갇혀있다. 뮤지컬 부분을 제외하고 아서 플랙이 있는 곳은 감옥, 법정이 대부분이다. 감옥은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이 반복되는 공간이다. 아서 플랙은 재판을 가디라며 무의미한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감옥에서 아서 플랙은 간수들에게 폭행과 희롱을 당하며 살아간다. 감옥은 사회적 부조리를 공간적으로 형상화하였다. 감옥은 무의미함의 집합체이며, 그 어떤 정의도 없으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공간이다. 감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아서 플랙은 법정으로 나아간다. 사회의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법정에서 아서 플랙은 끊임없이 난도질 당한다. 고담시의 법정은 정의를 구현하기 보다 상황 논리에 따라 아서 플랙을 재판한다. 아서 플랙이 조커로 변한 이유는 끊임없는 부조리한 사회, 예의 없는 사람들, 그의 실존을 밀어 몰아 세우는 사건들이 합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호인과 검사 하비덴트는 모든 것을 아서 플랙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해 버린다. 그의 불우한 어린시절이 아서 플랙을 조커로 각성시켰다는 의견이다. 일정 부분 그들의 주장에 동감하지만, 아서 플랙은 끊임없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려졌으며 학대당했다. 법정에서 아서 플랙은 조커로 각성하지만 배심원단의 유죄 판결 즉 죽음 앞에서 절망하며 아서 플랙은 조커의 자아를 포기해 버린다. 결국, 고담시의 어두운 부분을 상징하는 감옥과 정의를 상징하는 법정 모두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줄 뿐이며, 고담시의 부조에 아서 플랙은 패배한다.
할리퀸에게 버림 받은 아서 플랙
<조커2>에서 눈여겨 볼만한 캐릭터는 할리퀸이다. 사실 영화를 볼 때 할리퀸에 대한 구체적 묘사, 감정선이 없어서 실망을 하였지만, 이 또한 감독에 의도라고 생각한다. 할리퀸은 아서 플랙에게 조커의 추종자라며 자신의 배경을 속인다. 하지만, 그녀의 실체는 변호사에 의해 밝혀지고, 일반 시민인 할리퀸이 감옥에 자유롭게 들락날락 거리는 것 또한 이상한 부분이다. 결국, 할리퀸은 인간적 존재라기 보다는 조커를 숭상하는 사회의 집단광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사회의 집단 광기를 형상화하였기 때문에 할리퀸의 인간적 면모, 감정선 따위는 필요가 없다. 할리퀸은 조커에 대한 집단 광기를 형상화하였기 때문이다. 할리퀸은 조커 분장을 한 추종자, 아서 플랙을 살인한 이름 모를 아캄의 죄수로 변주된다. 이 세사람은 모두 다른 인물로 극중에 묘사되지만 한 인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할리퀸으로 대표되는 대중의 집단 광기는 아서 플랙을 원하지 않고, 조커를 원할 뿐이다. 아서 플랙이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도망쳐 렉싱턴의 계단을 올라 할리퀸에게 고백하였을 때 할리퀸은 아서 플랙에게 실망하며 이별을 고한다. 고담시의 조커 추종자들은 아서 플랙을 사랑하지 않았다. 오로지, 아서 플랙이 보여준 조커로서의 광기에 열광했을 뿐이다. 결국, 아서 플랙은 사회와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위대한 쇼가 끝나고 광대는 쓸쓸히 내려온다
도플갱어 혹은 더블에 대해 한번씩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에드거 엘런 포의 <윌리엄 윌슨>은 더블을 다룬 작품이다. 윌리엄 윌슨이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또다른 윌리엄 윌슨이 나타나 방해를 한다. 마지막에 주인공은 윌리엄 윌슨을 살해하지만, 심장을 관통당한 것은 주인공이었다. <윌리엄 윌슨>은 타락하는 주인공이 자신의 양심을 형상화하여 윌리엄 윌슨이라는 도플갱어를 만든 것이다. 주인공이 윌리엄 윌슨 즉 양심을 죽였을 때 주인공은 사망하게 된다. 조커에서도 도플갱어가 나타난다. 바로 순수하고 소외된 아서 플랙과 광기로 나타나는 조커다. 광기는 끊임없이 아서 플랙을 충동질한다. 할리퀸으로 변신하여 아서를 다시 조커로 각성시키고, 친구의 눈물에 양심을 되찾은 아서가 도망치자 조커 모습으로 분장한 추종자로 추격하며, 감옥에서 이름 모를 죄수로 변하여 아서 플랙을 살해한다. 결국, 아서 플랙은 조커에게 살인당한다. 조커는 사회적 부조리와 시스템에 의해 탄생하였다. 아서 플랙에게 나타난 조커의 모습은 대중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결국, 비합리적인 사회적 시스템은 대중을 광적인 집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속에서 양심을 되찾은 아서 플랙을 기능을 상실하고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아서 플랙의 서사를 바라보면 알베르트 카뮈가 쓴 <이방인>이 떠오른다. 카뮈는 인간이란 존재는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존재로 묘사한다. 카뮈의 실존주의에서 저항의 완성은 저항과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저항한 인간은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뤄야 완전한 저항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방인>의 뫼르소는 사형장에 끌려가며 수많은 사람들의 광기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마치 성자(聖者)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감독은 과연 아서 플랙의 저항이 문학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아름다운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조커>에서 아서 플랙은 비합리적인 고담시와 대결하며 승리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조커2>에서 아서 플랙은 조커도 아니었고, 감옥에서 바지까지 벗겨지며, 이름 모를 죄수에게 살해당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결국, 감독은 사회에 저항한 인간에 대해 카뮈의 낭만적 생각을 현실적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결국, 아서 플랙은 무대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쓸쓸히 사라진다. 감독은 아서 플랙의 삶을 통해 잔인한 사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