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결혼, 육아, 남들과는 조금 달랐던 순서
길거리는 형형색색의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큼지막한 트리 옆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몇몇 연인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완연한 축제분위기와 들뜬 사람들,
2014년 12월 25일.
임신테스트기를 들고 들어간 화장실에서 난 주저앉고 말았다.
스물일곱 평범한 직장인. 하지만 전혀 준비되지 않았었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부모님 얼굴이 떠오름과 동시에 꿈꿔왔던 미래가 산산조각나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명소리가 귓가에 가득해 남자친구가 다가와 일으켜줄때까지도 그가 계속 되내어 나를 불렀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왜이렇게 된걸까, 피임이라면 한번도 빼놓지 않고 확실하게 했었는데. 더없이 진한 두줄의 선은 내 앞길의 걸림돌, 아니 인생의 오점이라 생각되었고 결코 축복받을 수 없으리라 느껴졌다.
-어떡해
입으로는 되내었지만 이미 내 마음은 향하는 바가 있었고, 그 말은 단순히 내가 앞으로 행하게 될 일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함이었다.
-어떡하고싶은데?
굳은 표정으로 되묻는 남자친구는... 고작 스물셋이었다. 스물셋. 세상에. 아빠가 되기엔 아직 어린 나이. 내남편이 되기엔 더더욱 어린 나이.
-난 자신없어. 정말, 난, 아직.
사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험하고 무서운, 그러나 머리속으로는 상상하고 있는 그 단어를 내뱉지 않기위해 애썼던 것만은 또렷하다. 비열한 회피였다. 그가 대신 말해주길 바랐던.
그러나 정 반대의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러게 나한테 시집오랬잖아
정말 그순간 그 오만가지의 추악하고 오물내나는 상상으로 가득찼던 머리속이 깨끗이 비워지며 댕-댕-댕-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에 홀렸던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마냥 어린애로 보이던 남자친구가 내 남편이 되어 듬직하게 내곁에 있어주고, 그런 우리 사이에 사랑스러운 아이 한명이 치마폭에 매달리며 칭얼거리는, 그런 (결혼 안한 여자만이 할 수 있는) 말도안되는 상상을 하며,
나는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함께 병원을 찾았다. 분만 전문 병원이어서 그런지 임산부와 남편이 함께 앉아 차분히 기다리는 모습이 대다수였다. 행복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무리 속에서 우리 둘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환영받지 못한, 환영해주지 못한 아이였다.
이미 8주라며 초음파의 까만 타원과 그속의 희끄무리한 무언가를 가리키며 의사는 정신없이 주의사항과 설명을 이어갔다. 벌써 심장이 만들어졌고, 그 소리도 들을 수 있다며.
곧이어 세찬 아기의 심장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빠르고 크던지. 이유없이 눈물이 났다. 콧물까지 질질 흘리며 그래 우리 해보자, 우리 지키자 라고 했던 말을 시작으로
결혼과 열달간의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크리스마스의 은총이란 의미로 태명은 은총이라 지었지만, 똥 자가 들어가야 건강하다는 남편 지인들의 권고로 은똥이란 태명을 붙여줬다.
지금이야 웃고 얘기할 수 있지만 양가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한 길고 긴 시간이 필요했고 많은 상처를 입히고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기도 했다.
웨딩드레스는 예쁜것보다 배를 가려주는 디자인을 골라야했다.
배가 점점 불러오고 회사를 휴직한 후,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일이 결코 즐겁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기다리는 시간 대신 육아노동의 시간으로 변모할텐데 그땐 더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며, 임신과 육아는 현실임을 슬슬 깨달아갔다.
그렇지만 누군들 쉽게 부모가 되었겠는가.
미숙하고 환상속에 빠져살던 처녀 총각은, 어찌됐든 시간이 흐르면 미숙한 부모가 되고 능숙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게 아닐까
스물셋 꼬꼬마는 스물넷 애아빠+웬수덩어리 남편이 되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전역을 포기하고 직업군인이 되어 처자식을 부양하기 시작했고,
진급을 앞두고 있던 킬힐을 사랑하는 사원 나부랭이는 아기 토냄새 풍기는 아줌마가 되어 육아휴직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있다.
희끄무리하던 점에 지나지않던 무언가는 어제 처음으로 뒤집기에 성공한 후 하루종일 궁뎅이를 하늘 높이 쳐들며 울어대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떳떳하게 말하기엔 많이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더없이 큰 행복을 안겨준 두 남자만큼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