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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골초' 엄마가 담배를 끊었다

by 박상규


민물 장어구이 앞에서 갑자기 숨이 턱 막힌 건 엄마의 다짐 때문이었다.


“엄마 담배 끊었다. 이제 안 피울 거야.”


새해 첫 날도 아닌, 꽃 피는 4월 6일 오후였다. 무엇보다 엄마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분이 아니다. 노릇하게 잘 익은 두툼한 장어 한 조각을 엄마 앞접시에 올려 놓으며 물었다.


“왜?”

“의사가 피우지 말래.”


의사 말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온갖 권위 있는 말씀을 온몸으로 거부하며 살아온 게 엄마의 78년 인생이다. 그런 엄마가 왜 갑자기 의사 말을 따르겠다는 걸까.


“그냥…. 이젠 엄마도 힘들다.”


심각한 병이 아닌 건 다행이었으나, 내 입맛은 싹 사라지고 말았다. 45년 골초 엄마가 담배를 끊다니. 연인에게 이별 통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이 쿵 내려 앉았다.


여섯 살 무렵이었을까. 한 여성이 내 눈과 머리에 ‘엄마’로 각인된 그 순간, 엄마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 피우는 엄마’ 이미지는 내가 중년이 된 지금까지 한 번도 흐릿해지지 않았다.


엄마의 담배 사랑은 유별 났다. 형-누나가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해 나 혼자 가을운동회에 참여했을 때, 나는 운동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학교 뒷산의 무덤가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다.


흡연 여성이 들물던 1980년대에 이미 골초일 정도로 시대를 앞섰던 엄마에게도 선생님 앞에서 담배 피울 정도의 깡다구까지는 없었던 탓이다. 내가 볕 좋은 무덤가에서 김밥을 먹을 때, 엄마는 나보다 더 맛있게 담배를 피웠다.


엄마가 자궁암 수술을 받은 1996년의 일도 생각난다. 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엄마는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 순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내 귀를 엄마 입 앞에 갖다 댔다. 드디어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상규야…. 담배 있냐?”


피식 웃음이 나왔다. 2001년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간 입원했을 때도 엄마의 첫 번째 고충은 ‘병원 내 금연’이었다. 엄마는 척추 뼈에 금이 간 상태에서도 기어코, 어떻게든 병실을 빠져 나와 담배를 피웠다. 아주 오래 전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느냐”고 물었을 때 엄마의 답은 이랬다.


“네 아버지랑 이혼하고, 그때부터 피웠지.”


엄마는 1980년 그때, 나이 서른 셋에 자녀 넷과 남편을 남기고 홀로 집을 떠났다. 자녀에 대한 의무나 아내의 책임 따위를 훌훌 던져버린 결단, 그건 옆집 총각과의 사랑 때문이었다.


D9AE8DF4-4F9E-4BBA-B5FF-2F520FF1CD67_1_105_c.jpeg 엄마가 떠나기 전, 우리집이 있던 청계산의 그 자리. 지금은 카페가 영업을 하고 있다.

많은 걸 버려야만 시작되는 독하고 쓴 사랑, 엄마의 흡연은 그렇게 시작했다. 아프게 비워낸 자리에 달달하고 예쁜 것만 들어차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랑만큼 난해한 것도 이 세상에 없다. 엄마와 옆집 총각의 러브스토리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해피엔딩도 아니었다.


한 번 선을 넘어 바깥의 공기를 마셔본 엄마는, ‘아내와 가정 내 엄마의 역할’로 돌아오지 않았다. 안양시 남부시장 안쪽 창신여인숙 2층 끝방에서 홀로 삶을 꾸렸다.


엄마의 새로운 직업은 목욕탕 때밀이. 오전 5시에 시작해 밤 9시에 끝나는 노동, 일주일에 딱 하루 화요일만 쉬는 그 빡빡함 속에서도 엄마는 사랑 만큼은 쉬지 않았다. 다시 새로운 남자를 만났고 그와 헤어지면, 얼마 뒤 또다른 사랑을 했다. 돌림노래처럼 이어지는 만남-사랑-이별의 반복, 그렇게 엄마는 담배에 중독됐다.


노희경 드라마 작가가 썼다는 에세이를 2010년대 중반 인터넷에서 봤다. 기억에 남은 한 대목이 있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내 엄마가 바로 이랬다. 자기를 버려가며 사랑만 하는 엄마, 그 자녀들이 상처 없이 무탈하게 자란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영화, 드라마에선 결핍의 아이들이 상처를 이겨내고 강철같은 어른으로 성장하기도 하지만, 우리 2남2녀 형제들은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우린 다큐멘터리 속 등장 인물처럼 현실적인 캐릭터였다.


먼저 우리 형제들은 또래들보다 일찍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버지 포함 여섯 가족이 모두 흡연한 시간도 꽤 긴데, 그 비용보다 여전히 가슴을 아리게 하는 건 담배를 피우며 메워야만 했던 우리 형제들의 쓸쓸한 소년-소녀의 시간들이다.


이 글을 끄적이던 어느 하루, 우연치고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작은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술이라도 한 잔 했을까. 작은누나는 갑자기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나는 솔직히 엄마가 미워. 그때를 생각하면 엄마가 얄미워.”


작은누나는 나이 50이 넘었다. 아이가 셋이고, 그 중 둘은 성인이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작은누나의 가슴에선 여전히 사랑에 빠진 엄마의 모습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거다. 얄미운 모습으로 말이다.


40년 정도 지났으면, 이만큼 자랐으면, 이정도 지지고 볶고 살았으면, 그 시절의 기억이 무뎌질 만도 한데 그게 또 쉽지가 않다. 사는 건 이토록 복잡하고 징글징글하다. 전화를 끊기 직전 작은누나가 말했다.


“내가 어릴 때 막내인 널 두고 떠나서 미안하다. 난 그게 두고두고 가슴에 남는다.”


엄마는 창신여인숙에서 살며 자식들을 한 명씩 자기 품으로 데려 갔다. 맨 위 형부터 순서대로 말이다. 작은누나가 나만 아버지 곁에 두고 떠난 건 순서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안할 일도 아니다. 게다가 그때 작은누나는 고작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우리 2남2녀 중 가장 가슴이 여려 부모의 사랑을 갈구했던 건 작은누나다. 작은누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엄마에게 갔지만, 정작 엄마는 자기 사랑으로 바빠 작은누나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 쉰이 넘은 작은누나의 마음을 여전히 괴롭히는 건 그때의 기억이다.


사랑이 고팠던 누나는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과 출산을 했고, 그런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얼마 못 가 이혼을 했다. 엄마가 그랬듯이, 작은누나 역시 자기 아이를 충만한 사랑으로 키우지 못했다. 얄궂은 운명처럼, 엄마를 닮아 엄마와 비슷한 삶을 사는 건, 작은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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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하나도 새롭지 않은 두 사람의 도플갱어 인생. 오래된 일이니 이젠 다 괜찮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내 안에서도 이렇게 정리하고 살았는데, 왜 또 갑자기 두 사람의 닮은꼴 운명이 아프게 다가오는지. 작은누나의 전화 이후 이 글을 끝내지 못한 채 며칠간 끙끙 앓은 건 그 때문이었다.


나 역시 엄마를 하나도 원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엄마에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전쟁고아로 자라 당신의 엄마, 아버지 얼굴도 모른다. 아버지는 6.25 전쟁에 군인으로 나가 돌아오지 못했고 엄마의 엄마는, 엄마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엄마는 부모의 사랑이나 관심을 받지 못한 게 아니라, 그게 뭔지도 모른 채 자랐다.


그런 엄마가 따뜻한 사랑과 넘치는 관심으로 자식을 키운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당신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엄마의 따뜻함을 네 자식에게 나눠줘야 하는 일이 얼마나 낯설었을까.


사랑 받지 못한 탓에 사랑을 찾느라 자기 자식을, 어쩌면 자신마저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엄마와 작은누나. 서로를 미워하다 어느새 닮아버린 두 사람. 엄마에게 가지 않고 아버지 곁에 남은 나는 오랜 세월 거리를 두고 엄마와 작은누나를 지켜봤다.


나도 스무살 무렵엔 빨리 결혼해 아이를 낳고 싶었다. 부모와 다르게 나는 괜찮은 가정을 꾸릴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 역시 엄마처럼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제대로 사랑할 수 없을 거란 걸 어렴풋이 알게 됐다. 결국 나는 결혼은 물론이고 내 자식을 갖는 꿈을 진작에 포기했다.


나는 엄마와 작은누나의 삶을 가끔 연민하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의 상처를 바라보고 보듬는 걸 의미하니까. 난 내 상처만 살피느라 크게 사랑할 기회를 놓쳤지만, 엄마와 누나는 자기 상처에도 타인의 상처를 보듬으려 노력했지 싶다. 결국엔 자기가 더 상처받을지라도 말이다.


보고 배운 게 딱히 없어도 어쨌든 용기 있게, 때로는 무모하게 사랑으로 돌진했던 인간, 두 도플갱어는 나보다 훨씬 진화한 인간이 아닌가.


Ps) 며칠 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대학교 운동장을 걷고 있다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의사가 운동도 열심히 하래.”


담배 끊더니 운동도 하다니. 엄마는 나이 팔순에 회춘을 모색해, 할배 하나 꼬셔 또 연애를 하려는 걸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그게 우리 엄마고, 그래야 우리 엄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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