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한테 뭘 해줬다고!" 엄마의 돌진, 그 이후

by 박상규

택일이라도 한 듯이 아버지는 9월 7일 돌아가셨다. 여름도 가을도 아닌 시절, 당신이 가장 흔들리던 그 타이밍에 아버지는 세상과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그 시절 우리집은 청계산 계곡의 식당 오작교. 사람들의 왁자한 웃음, 지지고 볶는 고기 냄새, 새벽까지 이어지던 질펀한 술자리는 여름이 물러가면 동시에 끝났다. 휴가객이 직장과 집으로 모두 복귀하면, 무거운 침묵이 단골 손님처럼 오작교의 문을 두드렸다.


8말9초의 고독은 여름 장사로 1년을 사는 사람이 당연히 치러야 하는 비용이건만, 아버지는 여름 끝의 쓸쓸한 공기를 견디지 못했다. 손님처럼 집을 떠났고, 길게는 일주일간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과 가을 사이엔 어김없이 반복되는 사장 잃은 오작교의 시간. 해마다 9월이 되면, 시야 뻥 뚫린 푸른 하늘보다 우리집이 더 공허하게 보였다. 찬바람 불면 그렇게 집을 비우고 떠나더니, 아버지의 영영 이별마저도 9월 초였다. 시작과 끝이 같은 수미쌍관, 혹은 지독한 삶의 일관성. 아버지의 병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CDF40C93-9EF3-41A3-89B3-995F412E6211_1_105_c.jpeg

1996년 그때, 나는 대학교 2학년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나는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도, 장례식도 처음이었다. 세상 물정을 몰라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내 앞에 엄마가 나타났다.


옆집 총각과의 사랑을 택해 과감하게 남편과 가정을 떠난 엄마가, 조문객으로 등장해도 어색할 그 상황에서, 엄마는 상주 역할을 맡았다.


1980년에 이혼을 했으니, 아버지와 엄마는 그때 이미 함께 산 시간보다 남남으로 보낸 세월이 훨씬 길었다. 아버지는 한 차례 재혼을 했었고, 엄마도 여러 남자를 만나 사랑을 했다.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 나눈 걸 난 본 적이 없다. 둘 사이엔 2남2녀가 있었지만, 실상은 완벽한 타인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엄마가 상주로 이름을 올리고, 장례 절차를 주도하다니. 왕년에 결혼 한 번 했다고 사망한 전 남편 장례를 책임지게 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엄마도 무슨 마음을 먹고 작정하고 달려온 건 아니었다. 목욕탕에서 손님의 때를 밀다가, 전 남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자녀들의 아버지이기도 해서 한 번 와봤는데, 어떨결에 검은 상복을 입은 셈이었다.


상조회사가 보편적이지 않던 그때, 조문객의 밥, 육개장, 편육, 과일, 술, 음료 등 모든 음식을 주문하고 나르고 치우는 건 상주와 유가족의 몫이었다. 밤샘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화투와 방석을 준비하고, 술에 취한 사람끼리 시비가 붙으면 말리는 일까지 모두 유가족이 해야 했다.


일이 터진 건, 장례식 이틀째 아버지 입관식 때였다. 장의사는 나와 엄마 앞에서 정성스럽게 아버지의 염을 진행하고 마쳤다. 장의사는 허리를 숙이며 나와 엄마에게 말했다.


“고인 좋은 데 가시라는 차비라 생각하시고 노잣돈을 좀 내십시오.”


장의사들이 온갖 ‘저승 교통비’를 요구하며, ‘인 마 포켓’ 하는 게 마냥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장례식 경험이 없던 나는 현찰을 준비하지 않은 채 입관식에 참여했다. 엄마가 내겠지, 나는 가만히 있었다. 엄마는 ‘아들이 내겠지’, 하며 역시 가만히 있었다. 장의사가 다시 입을 뗐다.


“고인 좋은 곳으로 가셔야죠. 차비를 좀 내시면…”


망자를 가운데 두고 장의사와 유가족 사이에 발생한 어색한 침묵과 묘한 신경전. 참다 못한 엄마는 나를 보면서 턱짓으로 ‘아버지 차비 좀 드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현금이 없다는 답신을 보냈다. 엄마가 아버지 시신으로 돌진한 건 그때였다.


“그동안 나한테 뭘 해줬다고 이제와서 차비를 달래?! 나한테 뭘 해줬다고!!”


엄마는 염이 끝난 아버지 시신을 쥐고 흔들며 소리치면서 엉엉 울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이 뭔 일이 났나 싶어 뛰어 들어올 정도로 엄마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컸다. 엄마가 그렇게 목놓아 우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장의사는 나보다 더 놀랐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염을 하는 게 염려됐는지 나에게 말했다.


“아드님, 어머님 모시고 나가십시오. 나가셔서 감정 좀 추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엄마는 전 남편의 저승 가는 차비를 끝내 지불하지 않았다. 엄마는 밖으로 나와서도 한참을 엉엉 울었다. 울음을 그친 뒤에는 장례식장 한 구석에서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었다.


엄마의 표정은 마침내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미련도 후회도 없는 얼굴이면서, ‘내가 왜 전 남편 시신을 쥐고 울고불고 흔들었을까’ 하는 당혹스러움이 섞인 것이었다.


엄마의 돌진은 ‘엄마표 임기응변’이면서 동시에 오래 묵은 진심이었지 싶다. 나는 엄마에게 빨간 육개장과 쌀밥을 갖다 줬다. 엄마는 육개장에 밥을 말아서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모든 장례를 다 마지고 엄마는 목욕탕으로,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유산으로 내게 0원을 남겼다.


몇 년이 흐른 뒤인 1999년 9월의 어느 저녁이 지금도 생생하다. 자취방에서 여자친구와 밥을 해먹고 낮잠을 잤다. 나 혼자 잠에서 깼을 때 창밖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근데 눈물이 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픈 감정이 올라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너무 훌쩍 거린 나머지 여자친구가 깨어났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유가 없었고, 이유를 몰랐다. 정말이지 내가 왜 우는지 나도 모르겠고, 당혹스러워서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이듬해 9월에도, 그 다음 해에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8말9초, 찬바람이 불면 저절로 올라오는 슬픔과 우울증. 그건 아버지가 내 마음에 남겨 놓은 유산이었다. 어린시절 여름이 끝나면, 2학기가 시작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늘 불안했다.


‘오늘은 아버지가 집에 있을까, 없을까. 오늘 밤엔 아버지가 돌아올까, 안 돌아올까.’


여름 끝의 시원한 바람이 오래전 하굣길의 불안을 몰고 온다는 걸, 서른을 넘겨서야 깨달았다. 그걸 인지한 이후부터는 9월이 오면 여전히 슬프긴 하지만 과거처럼 흔들리진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걸, 흔들려도 묵묵히 참아야 한다는 걸, 살아온 세월이 알려주기도 했다.


요즘은 장례식장에 가도 빨간 육개장 먹는 게 쉽지 않다. 좀 더 저렴하거나 요리하기 편한, 된장국이나 북엇국 주는 곳이 많다. 그러다 간혹 빨간 육개장을 만나기도 하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엄마의 돌진과 임기응변, 그리고 오래 묵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생각난다.


1년에 최소 두 번 정도 빨간 육개장을 직접 끓인다. 정확히 말하면, 닭개장이다. 나는 소 대신 닭을 주로 이용한다. 요리를 해보면, 사실 육개장(닭개장)만큼 손이 많이 가고 귀찮은 음식도 없다.

38F91E5B-752F-4868-95A5-737406E0609C_1_105_c.jpeg

닭을 이용하는 나의 경우엔, 먼저 생닭에 감자 하나, 양파 반 개, 마늘과 양강을 넣고 육수를 낸다. 닭이 다 익으면 살을 발라낸 뒤 뼈만 넣어서 다시 한 번 끓인다.


그 뒤 대파를 잘게 잘라 고춧가루와 함께 볶아 파기름을 낸다. 여기에 육수를 붓고, 한나절 물에 담가 불려놓은 고사리와 토란대, 숙주나물, 발라놓은 닭 살코기를 넣고 또 푹 끓인다. 정말이지 작정을 하지 않으면 시도할 엄두가 안 나는 귀찮은 요리다.


그럼에도 나는 더운 여름 직전에 한 번, 찬바람 부는 9월에 한 번, 꼭 닭개장을 끓인다. 이 요란한 음식을 한 번 먹어줘야 더운 여름과 찬 계절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였던 6월 21일 토요일 빨간 닭개장을 끓여서 한 그릇 비웠다. 이제 더운 여름을 잘 버틸 일만 남았다. 난 아버지처럼 약하고 잘 흔들리지만, 엄마처럼 임기응변에 능하기도 하다.


살아보자. 어떻게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 세상에 그 하찮은 계란프라이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