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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월 Dec 31. 2020

각자의 소설이
두 사람의 영화가 될 때

넷플릭스 <보건교사 안은영> 리뷰

*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젤리를 본다. 살아있는 사람들, 혹은 죽은 혼령들은 정념에서 나온 어떤 젤리를 만드는데 이중 나쁜 젤리는 악영향을 줄 수 있기에 은영은 이것들을 제거하려 애쓴다. 은영은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나는 남들을 돕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오프닝에서 가볍게 정리한다. 아름다운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것이 아닌, ‘알고도 피할 수 없으면 당해야하는’ 그런 운명. 혼자 보여서 괴로운 젤리를 혼자 제거해야만 하는 고독한 영웅의 운명. 그럼에도 은영이 사는 말캉한 촉감이 느껴질 것 같은 오색창연한 젤리의 세계는 이상하지만 아름다워보이기까지 한다. 그럴 리 없는데.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 만약 젤리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그냥 어떤 정념들의 물화일 뿐이라면, 누구도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은 채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치원의 귀신처럼 무해한 정령들일 뿐이라면 은영은 좀 더 행복했을까? 그랬다면 은영의 현재는 조금 덜 고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은영의 학창시절은 비슷하게 외로웠을 것이다. 무리 안의 정상성의 기준이 가장 뾰족하게 솟아있는 10대의 아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다른 것을 목격하는 존재로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을테니. 간호사로 일하다 목련고의 보건교사로 부임한 안은영은 이제 갓 한 달차가 되었지만 바람 잘 날 없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 하느라 바쁘다. 격무에 시달리는 직장인처럼 피곤한 히어로는 종종 학교안에서 섬뜩함을 느끼는데 때로는 학생이었던 그 자신을 본다. 목련고에 각양각색의 젤리가 전염병처럼 잡아도 잡아도 퍼져나가고 불운의 상징인 옴이 출몰하며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자 은영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골치를 썩이는데 갑자기 자신을 찾아 온 옛 동창을 만난다. 학생이었던 은영을 기억하는 진짜 친구. 그러나 그는 그림자가 없는 부서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이 대목, 은영이 강선을 만나는 순간 잠시 멈춘다. 강선이 은영에게만 보이는 채로 그녀와 동행하며 은영의 일상을 함께 걸을 때, 이제까지 1인칭 안은영에 몰입하여 은영의 스펙타클을 함께 겪던 시선은 은영을 보는 강선의 시선과 교차된다.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는 은영,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운명에 순응하려는 옴잡이 혜민에게 행복해도 된다고 설득하는 은영, 인표에게 질투가 섞인 애정을 보이는 은영. 이 모든 은영의 모습은 강선에게 처음이었을 것이고, 강선에게 처음이기 때문에 관객에게도 낯설다. 인표의 손을 잡고 충전되며 발그레해지는 은영을 바라보며 ‘눈이 낮다’며 놀리는 강선의 마음은 어땠을까. 곧 이제는 친구의 곁을 지키는 이가 있는 것을, 그녀가 예전처럼 외롭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안도였을까, 곧 영영 떠나게 될 친구의 행복을 비는 씁쓸함이었을까. 서서히 부서져가는 강선이 은영의 생생한 삶을 휘감았을 때 작은 비밀이 밝혀진다. 은영의 세계가 처음부터 완성형의 총천연색은 아니었다는 것. 그건 각자의 불행에 갇혀 있던 강선과 은영이 만났을 때, 그가 은영에게 남겨준 선물이자 구원이었다는 것. 


“너는 말이야, 캐릭터 문제야. 

그럴수록 칙칙하게 가지 말고 달리는 모험 만화로 가야해.

그러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을거야.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가란 말이야.

사람들한테 사랑받으면서 살라고.”


은영이 보던 세계는 본래 회색 빛, 공포영화와 같은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세계였다. 강선의 그림이 자신에게 보이는 젤리들과 같다고 말한 은영을 강선은 그대로 믿어주고, 그녀에게 피할 수 없는 세상에 유쾌하게 맞서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면 애들이 싫어하지 않을 거라면서. 다치지 말고 유쾌하게 가란 강선의 말처럼 은영은 장난감 칼과 총을 무기로 달리며 젤리들을 무찌르는 히어로가 되며 무사히 성장했지만 다친 쪽은 떳떳하게 살려던 강선이었다. 그가 크레인 사고로, 사람 생명이 크레인보다 싸서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은영은 꿈에서 강선이 죽은 공사장을 찾아가 오열하고 그의 죽음을 목격하는데, 정작 크레인에 깔린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즉 자신의 죽음을 목격한다. 학생들의 안전을 걱정하면서도 은영은 그들에게 이입하지는 않았다. 상처와 치료하는 보건교사의 역할처럼 은영의 역할은 젤리로 인한 문제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강선의 소멸 이후 은영은 강선이 되어본다. 크레인 밑에 깔린 젊은 노동자의 죽음. 뉴스에서 봤지만 내 곁의 일인 줄은 몰랐던 일, 그리고 그 일이 곧 내 일로 체감이 되는 순간. 각자의 궤도로 스쳐지나가버릴 수도 있었던 행성이 서로 부딪히고 영향을 미치고 서로가 되는 과정을 겪고 나면 모든 것은 이전과 같지 않다. 과거의 강선이 은영의 미래를 바꾸었던 것처럼 강선의 죽음은 은영의 삶에 진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런 것들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안은영의 모험, 혹은 매혹적인 괴담 속 학교를 구하는 히어로 은영으로 <보건교사 안은영>을 기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직 이 에피소드 때문에 각자의 소설이 두 사람의 영화가 되는 순간의 마법으로 <보건교사 안은영>을 기록한다. 나의 불행에 잠식되어 세상의 비극을 마주할 수 없던 소년이 타인과 만나고, 각자 쓰던 소설이 함께 만드는 영화가 되며 서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나아가 타인을 구원할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 그래서 젤리들에 가려져 있던 사람의 얼굴을 비로서 마주하는 이야기로. 내 이야기는 아닌 줄 알았던, 몰라도 되는 줄 알았던 이야기는 곳곳에 있고 마법은 작은 곳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더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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