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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월 Jul 10. 2022

내몰리는 가장, 붙잡는 플래시백

영화 <미안해요, 리키> 비평

블랙아웃 화면 위로 면접을 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내 채용이 확정되며 페이드 인되는 면접관의 얼굴. 그의 반대편에는 블랙아웃 화면에서 느껴졌던 당당한 말투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다소 위축되고, 조바심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는 남자, 리키가 앉아있다. 면접과 채용으로 시작되는 영화 <미안해요, 리키> 시작부터 끝까지 노동하는 인간과  절박함을 다룬다. 특이점이 있다면 영화가 포커스를 맞추는 부부, 리키와 애비의 노동의 상당 부분은 이동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노동 모두 계속해서 타인의 집을 방문해야 하는 일이며, 시간제가 아닌 건수로 임금이 매겨지는 노동이다. 이들의 노동에서 이동 시간은 상당 부분을 차지(애비의 경우)하거나 전부(키의 경우)나 다름없다. 때문에 이들은 계속해서 이동하는데 움직이는 속도에 맞춰 나아가는 듯한 영화의 운동감은 간간히 외적 요인에 의해 지연된다.  지연들은 인물이 짊어진 속도를 조절하면서, 움직이는 이를 붙잡고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같이 느껴진다.


오프닝에서의 면접이 끝나고 택배 회사에 채용이  리키는 배송을 위한 밴이 필요하지만  이상 대출을 받을 수는 없다. 집에서 유일하게 현금화할  있는 것은 애비의 부모님이 남겨주신 차뿐이다. 애비의 차가 리키의 밴이  , 영화는 운전하는 리키와 걷거나 버스를 기다리는 애비를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이들의 이동이 지연되는 순간들은 영화에 리듬감을 준다. 인수인계를 받고 힘차게 액셀을 밟으며 시작한 리키의  근무 날, 불법주차에 딱지를 부과하려는 교통경찰과 리키 사이의 다툼이 벌어진다. 원씬 원테이크로 촬영된  씬은 카메라의 거리감은 유지하며 진행되지만, 바삐 도로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딱지를 받지 않기 위해 경찰에게 항의하다가 포기하는  택배 상자를 다시 밴에 넣고 넣고, 눈치를 보다가 어쩔  없이 차를 빼는 리키의 움직임으로  생동감과 함께 인물의 활력을 보여준다. 선덜랜드 팬인 택배 수취인과 맨유 팬인 리키와의 설전도 마찬가지로 리키의 이동(노동) 잠시 지체시키면서도  다른 활력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다른 씬에서 리키는 도착한 배송지가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것을 보고 길을 잃은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직전까지 리키를 바스트 숏으로 담던 카메라는 주위를 둘러보는 리키를 와이드 앵글로 보여주는데  순간의 리키는 하나의 풍경이  듯하다. 앞서의  장면이 멈춰서 있으면서도 제자리 뛰기를 하는  같은 호흡과 생동감을 준다면, 뒤의 장면에서 리키는 팽팽했던 리듬을 잠시 누르며 어딘가 쓸쓸한 인상을 준다. 오배송지에 도착한 것뿐임에도  장면이 앞서의 장면들과 다른 고독감을 주는 것은 리키가 노동의 시간에서도, 가장의 무게에서도 놓여진  혼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은 짧고, 이어지는 쇼트에서 리키는 다시 운전석에 앉아 이동하고 있다. 지연된 노동을 메우기 위해선  속도를 내야 한다.


리키가 배송을 하는 동안 애비는 가정방문 간병을 한다. 문 앞에서 끝나는 리키의 일과 문 안으로 들어가서 시작되는 애비의 일은 많은 것이 다르다. 리키가 수취인에 대해서 아는 것은 이름과 주소뿐이지만 애비는 이름, 성격, 때로는 그가 살아온 시간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다. 리키는 이름을 찾아가고 애비는 사람을 찾아간다. 애비의 이동을 지연시키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애비가 돌보는 이들은 모두 혼자 살고 있고, 거동이 불편하고, 대체로 가족과 단절되었으며, 외로워 보인다. 애비가 돌보는 노인, 로지가 ‘머리 빗겨줄까?’라고 물었을 때 애비는 ‘제가 시간이 없어요’라고 답하며 일에 집중한다. 다음 순간 그릇을 밀어버리는 로지의 손이 보인다. 놀란 애비는 깨진 그릇을 치우러 일어난다. 로지는 ‘미안’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릇을 고의로 밀어버리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로지의 손은 애비의 시간을 붙잡는 것처럼 보인다. 외로운 이들의 집에서 다른 집으로 가야 하는 애비의 이동은 자꾸 지연된다. 영화에서 반복되는 이동, 앞으로 나아가는 운동이 노동의 축에 있다면 운동을 지연시키며 당기는 축은 인간의 감정에 있다. 배당받은 노동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리키가 지쳐가고 애비는 말라가는 순간, 이들은 노동의 근본적인 이유인 그들 자신의 집과는 점점 멀어진다.


부모가 부재하는 동안, 큰 아들은 집 밖으로 돌고, 막내딸은 빈 집과 가족의 불안을 지킨다. 노동도, 방황도 아직은 하지 않는 막내 라이자는 가족 중에 가장 오랜 시간 집에 머무르기 때문에 가족이 서로에게 말하지 않는 것을 본다. 늦게 귀가한 엄마, 애비를 마중하며 영화에 처음 등장한 라이자는 오빠 세브가 친구들과 그래피티를 그리는 것을 보고 새벽에 홀로 집을 나가는 것도 본다. 한편 지쳐서 코를 골며 소파에서 자는 부모를 보고, 택배 배송을 하는 동안 리키에게는 단 2분의 쉬는 시간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도 본다. 모든 것을 지켜본 라이자는 리키의 이동, 노동을 가장 극적으로 막는 일을 저지르는데 이것은 집이 리키를 붙잡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라이자의 고백과 함께 차 키를 돌려받은 리키는 다음날 아침 다시 집을 떠난다. 졸음운전을 하며 불안한 역주행을 하던 리키의 밴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이어지는 장면은 리키와 애비가 세브의 방에서 세브의 그림들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씬이다.


이 씬은 왜 여기에 있을까. 일상적인 플래시백의 문법이지만 순간 ‘이것이 회상이 맞을까’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것은 <미안해요, 리키>가 종종 멈칫하기는 해도 계속 나아가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가족의 시간 축이 교차되기는 하지만 이 축이 결코 뒤로 돌아가지는 않았고, 그들이 이동을 하다가 돌아가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맥락으로 봤을 때 이 장면은 분명 플래시백이다. 아마도 라이자가 (오빠가 아닌) 자신이 차 키를 숨겼음을 고백한 지난 밤일 것이다. 이 씬에서 리키와 애비는 세브의 방에서 그가 그린 그림들을 보고 그동안 아들을 몰랐음을 인정한다. 그런데 사실 이 씬은 라이자의 고백 직후에 등장해도 맥락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막내딸의 고백 이후 반성하게 된 부모를 보여주며 더 진한 여운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구태여 졸음운전을 하던 리키와 잠시 차를 세운 리키가 린치를 당하는 장면 사이에 이 플래시백을 넣었다. 심지어 회상을 마친 리키가 어떤 표정이었는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반성하는 아비의 회상 씬은 아들 또래의 청년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린치를 당하는 씬의 인과인가. 그보다도 영화가 리키를 붙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타자와 외부 요인이, 그다음에는 가족이 붙잡고 마지막으로는 영화의 시간이 붙잡는다. 가장 모르고 있었던, 가장 지켜야 할 가족이라는 존재를 상기시키며 부디 위태로운 노동을 멈추어 달라는 붙잡음. 그러나 이어지는 씬에서 다시 운전대를 잡던 리키는 배송물을 뺏기고, 구타당하며 만신창이가 된다. 이제 리키는 한쪽 눈은 잘 보이지 않고, 갈비뼈가 부러졌는지도 알 수 없다. 다음날 아침, 온 가족이 리키의 출근을 막으려 하지만 리키는 기어코 밴을 끌고 나선다. 영화가 리키를 붙잡은 후 떠난 리키는 구타당했다. 가족의 붙잡음을 뿌리치고 떠난 리키는 과연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어쩐지 앞의 장면이 복선 같다.


출근을 위해 떠나는 리키와 그를 붙잡지만 실패하는 가족을 마지막으로 집에서 나온 라이자가 목격한다. 목격자인 막내의 존재는 <미안해요, 리키>와 같은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영화 <기생충>과 유사하다.  <기생충>에서 박사장 가족 중 ‘같은 냄새’로 암시되는 기택 가족의 역할극과 집 안에 있는 타자의 존재(근세)를 함께 목격한 유일한 이는 막내, 다송이었다. 다송에게 진실의 목격은 기절이라는 트라우마로 작용하며, 두 번째로 타자를 확인했을 때 다송은 트라우마를 반복한다. <미안해요, 리키>에서 라이자 또한 영원히 화목할 줄 알았던 가족들의 갈등, 진실을 목격하며 야뇨증이라는 트라우마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가장 절망이 극대화된 순간에 라이자는 다시 트라우마 증세를 보이는 대신 떠나는 리키를 응시한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여 다송이 목격한 진실도, 라이자가 목격한 진실도 똑같이 신자유주의 계급의 산물이라면 다송은 계급 밑의 타자를 보고, 라이자는 그 자리에 있는 부모를 보았다. 타자를 본 다송은 또 한 번 기절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본 라이자는 이제 울지 않는다. 아버지가 귀환할지, 아버지를 영영 놓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목격하며 트라우마를 극복한 자녀세대는 다른 선택을, 다른 시간을, 조금 더 희망적으로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리키와 애비의 시간을 목격한 관객에게 켄 로치 감독이 던지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을 보고도 또다시 놓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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