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양> 속 안드로이드 양의 기억과 세 가족이 양을 기억하는 방식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포즈를 취하는 아빠, 엄마, 어린 딸 세 가족의 모습이 앵글 가득 잡힌다. 아빠, 제이크는 카메라 뒤의 누군가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딸, 미카는 ‘오빠도 같이 찍어야 한다’고 재촉한다. 카메라 뒤에 서 있던 양은 잠시 후 달려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 백인 아빠와 흑인 엄마 사이 황인 아이들. 아마도 입양으로 구성되었을 이 가족은 서로의 부재에 마음을 쓰고, 같이 만든 저녁을 먹고, 가족 댄스 경연대회를 준비하는 게 일상인 화목한 가정이다. 리듬에 맞춰 같은 춤을 추던 양이 갑자기 쓰러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의 전원이 다시 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완벽한 4인 가족의 큰아들로 보이던 양이 사실은 부부가 딸을 위해 구매한 ‘중국인 입양아용 형제자매 테크노’였다는 것을 관객이 알게 된 순간부터 가족의 대화는 더 구체적으로 들린다. ‘오히려 잘됐다. 그동안 양에게 너무 의존했다’는 카이라의 말과 ‘그래도 그동안 양한테 돈을 얼마나 썼는데’라는 제이크의 말은 다른 뉘앙스로 보이지만 양을 필요해서 구매한, 일종의 가전제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에는 일치한다. 그러나 미카는 오빠를 계속 찾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양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공식 대리점에서 이렇다 할 답을 듣지 못한 제이크는 사설 수리업체를 찾고, 거기에서 양의 내부에 숨겨진 기억장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루에 한 번, 3초가 녹화되는 기억장치. 제이크는 그 기억장치 속 녹화된 필름들을 들여다본다.
양은 무엇을 기억하기로 선택했는가. 안드로이드에게도 무의식이, 욕망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도 꿈을 꾸는가.
제이크가 사설 수리업체에 양을 맡기고 온 밤, 침대에서 자고 있는 미카의 씬은 수리업체의 철제 테이블에 흉부가 절개된 채 누워있는 양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플래시백. 하굣길에 시무룩한 미카에게 양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미카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진짜’ 부모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고백한다. 고민하던 양은 사과나무 밭으로 미카를 데려가 ‘다른 나무에서 왔지만 이제는 이 나무의 일부가 된 가지’를 보여준다.
“이 가지 보여? 이 가지도 다른 나무에서 온 거야.
그런데 봐. 너는 이 가지처럼 엄마 아빠랑 연결되어 있어. 넌 가족 나무에 일부야. ‘진짜’로”
“그럼 오빠도 그렇겠네.”
순수한 동생의 말에 양은 답을 하지 못하고, 미카는 오빠의 무언을 알아채지 못한 채 다른 질문을 던진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만난 양은 기쁘게 ‘접목’에 대해 설명하고 뒤이어 내재된 중국에 대한 ‘재미있는 사실’(Fun Fact)을 뜬금없이 내뱉는다. 그리고는 미카의 눈을 바라보며 ‘두 나무 모두 중요하다’고 말한다. 양의 대사와 디졸브 되는 씬에서 양은 다시, 가슴이 벌어진 채로 작업장의 철제 테이블에 누워있다. 이것은 미카의 상상인가? 그러나 미카는 아직 양이 그곳에서 어떻게 있는지 모른다. 잠자는 미카와 전원이 꺼진 양으로 연결되었다가 둘만 공유하는 순간이 플래시백으로 들어가고, 다시 현재의 양으로 연결되는 시퀀스의 구성은 마치 이 장면이 양의 꿈인 것처럼, 혹은 이제는 오빠가 없을 미카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뿌리를 알려줄 존재 없이 혼자 성장할 동생을 향한 걱정. 엄마, 아빠는 모를 근원에 대한 고민을 나눠줄 수 없다는 미안함.
안드로이드에게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없는가. 양이 망가지기 전의 제이크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이크도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며 혼란스러워진다. 제이크는 안드로이드도 친구를 사귈 수 있는지, 거울 너머의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 있는지, 입력되지 않은 노래를 외우고 또 가르쳐줄 수 있는지 몰랐다. 몰랐던 시간들을 들여다보며, 제이크는 양을 새로이 기억한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 양이 카메라 뒤에서 머뭇거리던 순간 제이크, 카이라, 미카 세 사람의 행복한 미소가 녹화된 것을 보며 제이크는 그제야 카메라 뒤의 양이 애틋하게 가족을 바라보던 얼굴을 떠올린다. 차에 대한 ‘지식’ 대신 ‘경험’이 있었다면 좋았겠다는 양에게 차를 따라주며 ‘찻집은 대대로 이어지는 가업’이라고, ‘이제 너한테도 사업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것도. 인간과 비인간, 복제 인간과 진짜 인간. 마음속으로 선을 긋고 구분하는 데에 더 익숙한 그이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도 다시는 켜지지 않을 양의 부품을 재판매하는 일은 내키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양을 아들처럼 생각하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양의 친구, 에이다를 찾으러 카페에 간 제이크는 ‘아들의 친구를 찾고 싶다’며 양을 아들로 호칭하고 그가 자신을 찾는다는 걸 알게 된 에이다를 만난다. 이제 제이크는 양에게 자신이 몰랐던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을 양의 기억 여행은 어느새 루틴이 되고 제이크는 점점 동화에 가까운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양이 인간이 될 수 없어서 슬퍼했느냐’는 질문에 에이다는 코웃음을 친다. 그거야말로 너무 인간다운 질문 아니냐며. 양이 바란 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닌 가족이 되는 일이었다. 지치지도, 화내지도, 병들지도, 늙지도, 변하지도 않는, 그리고 ‘구매할 수 있는’ 가족이었던 양. 제이크는 양의 기억장치 속 숨겨진 공간에서 (거의 새 제품이나 마찬가지라는 판매처의 말과는 달리) 그가 다른 가족과 몇 십 년을 살았던 기억을 본다. 아기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가 노인이 될 때까지, 엄마를 돌보던 간병인 소녀가 죽음을 맞기까지, 양은 영원히 늙지 않는 시간 속에서 고요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이는 어른이 되었지만 형이라 불렀던 안드로이드는 동생보다 훨씬 어린 채 남아있다. 가족이라는 역할을 잃어버린 존재들은 어디로 갈까 , 혹은 어디에 남을까.
카이라가 기억장치에 대해 알게 된 후 본 양의 기억(시선)에는 박제된 나비 수집품이 있었다. 양이 들여다보던 것처럼 나비 박제를 들여다보던 카이라는 어느 환한 낮에 자신이 수집품을 보던 양을 불렀던 기억을, 마치 기억에 호명되듯 뒤돌아본다. 나비 이야기가 나오자 습관처럼 중국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던 양은 문득 노자의 말을 빌려 ‘애벌레에게는 끝이지만 나비에게는 시작이다’는 경구를 전한다. 이 말을 듣던 카이라는 ‘마음에 든다’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장면은 현재, 어두운 밤의 방에서 생각을 되짚는 그녀. 다시 회상으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카이라는 ‘너도 그 말을 믿어?’라고 묻는다. 끝과 시작에 대한 대화. 그 순간에는 지나쳤을 말들이 오디오로 반복되고 장면이 다른 각도에서 다시 재생된다.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괜찮다’는 양에게, ‘그게 널 슬프게 만든 적도 있냐’고 카이라는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양은 대답한다. “‘무’가 없으면 ‘유’도 없으니까요.” 눈을 깜빡이듯, 찰나에 다시 현재의 카이라가 나오고 다시 이어진 회상에서는 방금 전 둘의 질문과 대답을 반복돼서 보여준다. 그때 카이라는 ‘노자의 말이냐'라고 물었고 양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런 철학적인 말은 입력된 것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말인 것처럼. 그 말이 카이라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것처럼. 다시, 현재. 이제 카이라는 이것이 양이 온전히 스스로 깨달아서 한 말이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양이 모든 순간에 정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모든 기억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제이크는 비로소 ‘양이 박물관에 전시되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모든 인간에게 중요한 양의 기억은 연구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카이라는 논리적인 그 말에 수긍하고 권태로 지쳐있던 두 사람은 포옹한다. 존재로 가족을 결속시켰던 양은 이제 부재로 부부를 화해시키는 것 같다. 하지만 카이라가 잠든 밤, 제이크는 그 옆에 누워있는 대신 소파에서 다시 양의 기억을 본다. 그 사이, 어둠을 무서워하던 미카는 방을 빠져나와 양의 방으로 건너간다. 양이 없는 양의 방에서 두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중국어로 작별 인사를 전한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애도의 방법을 배운 미카는 이제 오빠나 아빠 없이도 밤에 혼자 물을 마실 수 있을 만큼 컸다. 미카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있는 아빠에게 양에게서 배운 노래를 들려준다.
I wanna be 내가 되고 싶은 것
I wanna be 내가 되고 싶은 것
I wanna be just like a melody 난 그냥 멜로디처럼 되고 싶어요
Just like a simple sound 그냥 단순한 소리처럼
Like in harmony 하나의 화음처럼요
프로그래밍되지 않았으나 소중히 간직하고 물려준 노래. 미카의 노래가 양이 있던 곳곳을 들여다보고 곧이어 화음이 된다. 먼저 늙어버리거나 ‘무’로 돌아가버리던 인간들을 보던 양은 이제 없어짐으로써 그동안 있었음을 증명했다. 입력된 지식 너머 경험에서 우러나온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역할을 다한 존재는 어디로 갈까, 양은 여기에 있다. 진짜 가족이 된 안드로이드는 그렇게 멜로디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