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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사월 Aug 23. 2022

너를 위한 우주

04번째 필름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김원호(기주봉 배우) 시점


담배를 한 모금 마셨다. 좀 전에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들어갔으니 지금 안에서 네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있겠지. 정확한 시간이었다. 시간을 가늠하다가 수영에게 넌지시 ‘희정씨가 늦는군’이라 말하니 수영이 희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희정은 수영의 부탁이면 거절하지 못한다. 오지랖 넓고 소문을 듣는 걸 좋아하는 수영과 조용한 희정은 상반된 성격이었지만 그런 눈치없이 쾌활한 수영의 성격이 희정이 힘들 때 도움을 준 덕이다. 이번에도 역시 희정은 춘수를 데리고 왔다. 다행히 표정이 지난번과 같은 마냥 들뜬 밝음이 아니었다. 들어가는 춘수에게 눈인사를 했다. 그는 조금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연이어 고개를 숙였다. 아니지 자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일세. 입 모양으로 주의를 주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고 담배를 꺼내서 마셨다.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하지는 않겠지. 여기는 만회하기 위해 있는 우주이니.


처음에 만났을 때 그가 어떻게 보였는지 그 스스로는 알까. 들떠 있었고 또 불안해보였다. 사랑인 것 같은 감정에 들떠 보였고 사랑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처지에 불안해보였다. 수영의 집요한 질문으로 내뱉지 않았던 진실이 탄로났을 때, 희정의 표정이 점차 굳을 때 그는 또 어때 보였는지. 함께 들어왔다가 각자 나가던 두 사람의 발걸음은 어땠는지. 말이라는 게 참 그렇지 않나,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다 담을 수는 없고 또 무슨 말 때문에 담은 마음이 엎어지는 일은 참 쉬우니. 그런 그가 희정을 만나고 헤어진 다음날, 평론가에게 화를 내는 걸 보고는 궁금해졌다. 당신이 희정과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할까. ‘중요한 말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당신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준다면 그땐 어떻게 희정에게 진심을 전할까. 하지만 기회를 다시 준 건, 그보다 희정을 위해서였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쌓여 움츠러들고 조금 더 예민해진 희정을 위해.


당신을 아주아주 먼- 평행 우주로 잠시 데려다주겠다. 시차가 있는 우주를. 시간이 이른 우주에서 온 당신은 겪어본 적 있지만 희정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날 그때처럼 처음인 시간. 당신이 쓸 수 있는 시간은 수원에 도착하고 떠나기까지의 시간 꼭 그만큼. 당신이 있을 수 있는 곳도 당신이 머무르거나 스쳤던 장소들. 그 우주에서와 이 우주에서의 당신, 그 때와 지금의 당신은 다를 수 있을까.


담배를 피고 잠시 생각을 하면서 걷던 사이 춘수가 나왔다. 이번에는 희정과 함께였다.


“가시는 거에요?”

“네 가는 길입니다. 선생님, 정말 좋았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함춘수는 연거푸 인사를 했다. 그래요. 좋았다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세요. 귀한 분들인데. 우리 그 우주에서는 틀렸으니 이 우주에서는 틀리지 말아봅시다. 상처 주지도 말고 오해하지도 말고. 그냥 지금 느끼는 그 진심 그대로.


절에서 치는 종소리가 울리면 희정은 다른 평행우주에서의 희정이 그랬듯 잠이 든다. 하지만 혼자 집에 돌아와 잠이 든 그 때의 희정과 춘수와 함께 돌아와 밖에서 춘수가 기다리는 걸 알면서 깜빡 잠이 들어버린 지금의 희정은 다르다. 지금의 희정은 좋은 꿈을 꾼다. 사랑하고 사랑 받은 꿈을.


이만하면 됐다.



춘수는 잠에서 깼다. 수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차가 너무 막혀서 깜빡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선생님이 몇 마디의 말씀을 하시고 수원에서 겪은 하루 반의 일들이 다시 펼쳐졌는데 비슷한 것 같으면서 아주 달랐다. 올라올 때는 비를 맞으면서 혼자 역으로 갔는데 꿈 속에서는 희정이 극장으로 와서 인사를 건냈고 밤에는 볼 뽀뽀도 해주었었다. 너무 생생해서 어느 편이 꿈인지 헷갈린다. 그럴 수 있다면 희정을 만나고 올라온 쪽이 현실이었으면 좋겠는데.


가방을 뒤졌다. 생각해보니 꿈에서는 시집을 받지 않았었다. 가방에 시집이 잡혔다. 역시 꿈이었던 모양이다.


[… 우리 삶의 표면에 숨겨진 것들의 발견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이라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 - 원호]


원호? 여자이름 치고는 특이한데 생각해보니 이름을 묻지는 않은 것 같다. 시인의 이름과도 다르다. 직접 쓴 시집이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꿈에서는 반지를 낀 희정이 웃었고 눈 길 사이로 나아갔다. 그걸 본 것만으로도


좋은 꿈을 꿨다. 이런 감정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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