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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영 Oct 10. 2016

로그, 로그라이크, 그리고 스타트업

Level 0으로 시작하기

    2016년 9월 30일 자로 잘 다니던 글로벌 TOP10 기업을 퇴사하고,  코드스쿼드라는 IT 교육 관련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좋아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어서.'라고 쓰려고 했는데, 글을 쓰는 순간 '그럼 이전 회사는 안 좋았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아니다, 분명 내가 다니던 회사는 멋진 구성원들과 기업 문화를 가지고 있는 좋은 회사였다. 그냥 순간의 변덕으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자. 

새로 시작한 스타트업 코드스쿼드의 로고입니다. 밥은 먹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codesquad.kr


    몇 번의 외부 강연에서 내가 청중에게  전달한 메시지는 'Carpe Diem - 오늘을 즐겨라'였고 스스로 그 모습을 잘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타트업은 그런 나의 성격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행동으로 옮기고 나니 모든 것이 낯설다. 마치 로그 게임에서 게임 오버가 되어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다. 


    요즘은 로그라이크라는 하나의 장르로 알려져 있는 게임의 원조 '로그(Rougue)'는 원래 유닉스에서 돌아가는 텍스트 기반의 게임이었다. 텍스트 에디터인 vi와 마찬가지로 h, j, k, l 키로 이동을 하는 간단한 RPG이며 플레이어는 몬스터를 무찌르고, 보물을 찾으면서 던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던전을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적도 강해진다. 그런데 이 로그 게임만의 독특한 특징은 캐릭터의 사망 이후에 있다. 플레이어의 사망 이후에 일반적인 RPG는 세이브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거나, 부활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반면 이 게임은 그렇지 않았다. 사망 후 다시 시작하면 모든 아이템과 레벨은 초기화된다. 그뿐만 아니라 매 층의 던전은 매번 초기화가 되기 때문에 맵이나 공략법을 외우고 진행하는 방법조차 통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라는 격언에 걸맞은 게임이다. 이 게임 덕분에 당시 전 세계의 수많은 대학생들이 밤을 새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로그 게임은 이후에 로그라이크로 발전하면서 넷핵, 풍래의 시렌과 같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는 게임으로 이어지고 역시나 많은 게이머들에게 좌절, 공포, 기쁨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만들었다.  

유닉스 버전 로그 게임 https://en.wikipedia.org/wiki/Rogue_(video_game)

     로그류 게임의 매력은 '풍래의 시렌' 개발사 춘소프트의 인터뷰에서 잘 드러난다. 처음 이 게임을 접하고 사망 후 초기화라는 충격적인 컨셉을 접한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게임을 클리어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춘소프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게임 속 캐릭터의 레벨은 초기화되지만, 플레이어 여러분의 레벨은 초기화되지 않습니다.

     로그류 게임은 신기하게도 처음 접하면 금방 사망하지만, 플레이를 하면 할수록 게임의 이해도가 높아지고 좀 더 깊숙한 던전에 이를 수 있게 된다. 거기다가 불확정성 요소가 상당히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운'이라는 요소도 클리어의 필수 조건이다. 실력과 감, 그리고 그 날의 운이 잘 적용했을 때 드디어 대망의 게임 클리어로 이어지게 된다. 


    아침에 문득 사무실도 PC도 없이 회사의 수입과 투자받은 돈마저 0원인 상태에서 출근을 하는 내 상태가 마치 이 로그 게임의 Level 1 상태와 거의 비슷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전 회사에서 쌓았던 모든 것을 버리고 - 혹은 잃어버리고 - 이제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전의 내 직장은 꽤 훌륭한 직장이었고, 나는 그 테두리 안에서 안정과 구속, 그리고 부분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면 이제는 나는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강제적으로 놓이게 되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로그 게임과 마찬가지로 이전에 쌓았던 경험치는 남아 있는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삶의 경험치, 운,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동료들과 함께 하면 그래도 조금은 생존하기에 유리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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