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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고까지 마쳤지만 내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실패의 조각, 다시 쌓아 올린 기록.

by fragancia

* 이 매거진은 Eli 작가님과 공동으로 하는 글쓰기입니다.


후회로 끝난 실패는 교훈이 되지 않는다. 복기 없는 감정은 그저 찌꺼기고, 복기 없는 회복은 반복될 상처다. 삶이 달라지고 싶다면 감정을 먼저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구조부터 복원해야 한다.
무엇이 나를 무너지게 했고, 무엇을 놓쳤고, 다음엔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복기 없는 사람은 결국 같은 상황을 다른 사람에게서 반복하게 된다.

변화를 만들고 싶다면 어제의 하루를 끝내기 전에 해체해봐야 한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무너졌던 방식부터 기록해야 한다.

- 각성 (김요한)


Q.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오늘 반드시 정리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후회로 끝난 실패는 교훈이 되지 않는다. 복기 없는 감정은 그저 찌꺼기고, 복기 없는 회복은 반복될 상처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 묵은 돌멩이 하나가 뒤집히는 소리를 들었다. 돌 밑에 눌려 있던 감정들이 썩은 냄새를 풍기며 솟구쳐 올랐다. 나는 지난 시간을 후회로만 채워 왔음을, 그 후회가 나를 갉아먹으며 제자리로만 되돌려 놓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질문은 내게 돌아왔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오늘 반드시 정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2023년 5월, 브런치를 통해 출판사의 메일을 받았다. 책 출간과 관련된 몇 번의 제안서가 왔지만 내 마음에 닿지 않아 고사했다. ‘언젠가 내 글이 세상의 빛을 만나게 될 날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작은 꿈을 간직한 채 기다렸다. 출판사의 제안서를 꼼꼼하게 읽고 미팅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 나는 출간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내게 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밤을 지새우며 한 달 동안 글쓰기에 몰입했다.


초고를 마무리한 뒤 훌훌 털고 일어나, 다음 날 거제로 떠났다. 가족들과 먹고 마시며 30일 내내 끙끙 앓던 마음을 조금씩 달랬다. 그 밤, 뿌듯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내 눈앞에는 유난히 환한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2주 뒤, 출판사 담당자의 전화는 그 달빛을 단숨에 지워버렸다. 긴 침묵 끝에 들려온 한숨,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내 원고는 일기 같고, 독자가 감동할 지점이 없으며, 잘 읽히지 않는다는 피드백이 돌아왔다. 다행히 얼굴을 맞대고 듣지 않은 것이 위안이었다. 그 순간 터질 듯 붉게 달아오른 내 얼굴은 나 자신에게조차 부끄러웠으니까.


2주 동안 마음을 다잡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하필 퇴고를 할 무렵, 교통사고로 인대가 끊어져 손가락 수술을 받아야 했다. 글을 쓰는 손이 가장 아프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자판 위에 손을 올릴 때마다 통증이 올라왔고, 단어 하나를 수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퇴고는 느려졌고, 생각은 자주 끊겼다. 다행히 출판사에서 내 몸을 배려해 퇴고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제본한 원고를 들고 다니며 손가락 재활을 받았다. 수차례 퇴고 끝에 마침내 탈고를 마쳤다. 원고 파일을 보내던 날, 이미 책을 낸 작가들을 떠올리며 그들의 무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출판사 담당자께서 원고를 모두 읽고 문자를 보내주셨다.
- 원고는 검토해 보았는데 잘 정리해 주셔서 많이 손보지 않아도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좋은 원고가 되었습니다. 저희가 교정을 조금 더 보고 디자인 작업을 해서 보내드린 후에 뵈어도 될 것 같아요. 책 제목과 표지 디자인, 중제목 위주로 고민하면서 정리를 해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내 이름이 새겨진 책을 머지않아 만날 거라는 생각에, 계약서에 서명하던 순간보다 오히려 마음이 설렜다. 그리고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작년 겨울, 출판사의 사정이 어렵다는 전화를 받았다. 전 대통령의 계엄으로 세상이 어지러운 시기였다. 결국 계약은 해지되었다. 출간 계약 해지서를 받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순간은 마치 불 꺼진 극장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었다. 객석은 텅 비어 있고, 조명도 꺼져 있는데, 무대 위에서 나 혼자 대사를 읊는 어색한 고립. 그 공허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고, 나는 내 안의 목소리를 탓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사고만 당하지 않았다면? 손가락이 멀쩡했다면?' 이런 질문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마다 가슴속에 못이 하나씩 박혔다. 자존감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고,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원고 파일을 열어보는 일조차 두려웠다.


그 후로도 한동안 후회의 진창 속을 헤맸다. 후회는 마치 거품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이내 꺼지며 썩은 물만 남겼다. 무엇도 배울 수 없었다. 무엇도 새로워지지 않았다. 그저 반복되는 자기 탓, 자기 연민, 자기부정. 돌이켜보면 그 모든 시간은 - 복기 없는 감정”- 뿐이었다.


“복기 없는 회복은 반복될 상처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상처를 보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그저 손가락으로 껍질만 긁고 있었던 것이다. 후회가 아니라 복기를 해야 했다. 구조를 해체하고 내가 무너진 이유를 냉정히 적어 내려가야 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무엇이 나를 무너지게 했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그리고 다음에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를. 출판의 무산은 분명 나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퇴고 일정을 더 치밀하게 조율할 수 있지 않았을까?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할 수는 없었을까? 복기는 결국 감정이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는 자문들이었다.


이제야 이해한다. 후회는 나를 어둠 속에 가두지만, 복기는 나를 바깥으로 이끈다. 복기는 상처를 들여다보는 작업이 아니라, 그 상처가 생겨난 방식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언젠가 다시 같은 폭풍이 닥치더라도, 그 폭풍을 다른 방식으로 맞을 수 있다.


이제 다시 글을 쓴다. 이 경험을 기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출판의 무산은 내 실패가 아니라, 나를 다시 쓰게 만든 하나의 장치였다. 손가락의 흉터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막는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내 문장 속에 작은 진동을 불어넣는 흔적이 되었다. 그때의 무너짐을 기록했기에,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다시 글을 쓰는 길은 여전히 불안정하다. 그러나 감정의 찌꺼기 속에 잠겨 있지 않다. 나는 복기하는 사람이고, 기록하는 사람이다. - 후회로 끝난 실패는 교훈이 되지 않는다. -
이제 후회가 아닌 복기로,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글을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것이 내가 오늘 반드시 정리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내일을 살아갈 힘이다.


1489326.jpg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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