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자만

책의 주인공

by 서그냥

책을 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책을 떠올리지 못하는 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열심히 읽은 시간을 비웃는 것 마냥 사라지는 기억은 꽤나 얄밉다. 이제 기억은 못하지만 무의식이나 마음 구석 한 켠에 남아 필요한 순간에 나를 도와주기를 바래볼 뿐이다.


하지만 의식에 뿌리내리지 못한 기억은 효과를 발휘하더라도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다. 비효율은 개선해주는 것이 인지상정. 기억을 해보기로 한다. 기억을 잘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볼 수 있는 방법은 구조화를 해보는 것이다. 책에는 모름지기 목차가 있다. 1부, 2부, 3부와 같이 큰 대제목이 있고 그 밑에 소제목들이 붙는다. 책의 내용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각 목차들을 기억하면 책의 큰 틀을 기억할 수 있다. 몇 번 해보다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첫번째, 목차가 앞부분만 잘 외워진다. 암기를 하기 위해 구조를 되새기다보면 앞부분부터 반복해서 떠올릴 것이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외우기가 더 어려워진다. 초두 효과도 있을 것이다. 처음 접하는 정보가 가장 인상깊게 머릿속에 남는 법이다. 뒷부분에서부터 반복하면 되지 않느냐고? 잘 해보지 않아서 어렵다.


두번째, 목차를 얼추 기억하게 되었지만 해당 목차에 세부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다. 겉핥은 내용만 떠오르고 알맹이가 떠오르지 않는다. 열심히 외웠는데, 껍데기만 기억하는 꼴이라니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정보를 구조화하는 것에는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있다. 책의 주인공이 책 제목으로 고정되어버린다. 책 제목을 맨 위에 두고 제목을 설명하기 위한 대제목, 그걸 설명하기 위한 소제목. 생각의 방향이 다분히 일방향적이다. 탑다운적인 흐름이고 중앙집권적인 사고방식이다. 기억은 당연히 주인공을 잘 떠올릴 수 밖에 없다. 엑스트라는 중요하지 않지 않은가. 문제는 껍데기뿐인 주인공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주인공을 바꿔줄 필요가 있다. 2부의 1장을 읽고 있다면 현재 생각의 주인공은 2부의 1장이 되어야한다. 책 제목의 부하로서 존재하는 2부 1장이 아니라 말이다. 2부의 1장이 주인공이라면 엑스트라는 1부 마지막장과 2부 2장이다. 당연히 2부 2장으로 들어서게 되면 주인공은 2부 2장이고, 엑스트라는 2부 1장과 2부 3장이 된다. 각 목차가 주인공을 경험한다면 목차들끼리 촘촘하게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단순히 한줄로 꿰어내 끊어지기 쉬운 단추들이 아니라 각각의 단추끼리 여러가닥의 실로 튼튼하게 연결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엮인 소제목들은 자연스레 대제목으로 귀결될 것이고 책의 제목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바텁업적인 사고방식이며 분산제어적인 정보처리 방식이다.


J는 일반적으로, 또는 상대적으로 정리를 잘한다. 나는 J를 정리의 ㅈ을 딴 알파벳으로 떠올리기도 한다. 정리라는 것은 고정된 틀을 만든다고도 바꿔서 표현할 수 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보들을 깔끔하게 정리하면 그것만큼 보기 좋은 것이 없다. 하지만 정리라는 것은 틀을 고정시키는 만큼 틀이 아닌 것들은 소외될 수 밖에 없다. 알맹이가 소외된 껍데기는 볼품없기 짝이 없다.


고정된 틀만을 고집할 게 아니라 흐르는 변화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기억을 잘하고 싶다면 책의 제목과 대제목만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 각각의 엑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여기다보면 자연스레 대제목과 책 제목이 떠오를 것이고 알맹이가 가득찬 껍데기(?)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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