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 1억 모으면 뭐가 달라지나
(1)
소비와 저축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는 20대 때 열심히 모아서 목돈을 만들고 그 돈으로 투자하여 자산을 불려가야 한다는 관점과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하는 것을 아끼지 말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성장해야한다는 관점이 있다.
나의 20대는 절약보다는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열심히 하는 쪽에 좀 더 가까웠다. 그 이유는 아무래도 아빠의 영향인 것 같다. 자영업을 하셨던 아빠는 열심히 일 한 만큼, 운이 따라주는 만큼 많이 벌고 그만큼 열심히 쓰던 때가 있었다. 그 모습이 사치스럽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주 7일 밤낮 없이 일해서 번 돈을 본인과 가족을 위해 쓰는 아빠는 행복해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나도 많이 벌어서 많이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갖고 싶은 것을 줄이기 보다는 성실하게 모으고 부지런히 움직여서 열심히 벌자.' 이것이 내가 20대 때 소비와 저축을 바라보았던 관점이다.
(2)
20대 때 돈을 적정 수준에서 많이 써 보는 것은 필요한 것 같다. 여기서의 '많이'는 절대적으로 많은 돈을 펑펑 쓴다는 의미는 아니고 다양한 분야에 쓴다는 의미이다. 해외여행, 운동, 취미, 꾸미기, 명품 등. 물론 아예 관심이 없다면 굳이 소비할 필요는 없지만 궁금증이 있고 욕구가 있다면 그 분야에 돈을 써 보는 것을 추천한다. 왜냐면 써봐야 이 소비가 나에게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위에 예시로 들었던 모든 카테고리에 대해서 전부 많은 돈을 써 보았는데 나에게 가치 있었던 소비는 취미와 명품가방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거부감과 스트레스 많은 내 성격 상 해외여행은 1-2년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20대 중반과 비교했을 때 지금은 해외여행에 쓰는 소비가 현저하게 줄었다.
또한 나의 경우 언젠가 사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 비싼 물건이 있다면 무조건 빨리 사는 것이 이득이었다. (다만, 100만 원이 넘어가는 소비를 결정할 때는 1년 이상 고민한다.) 가격 상승률이 가파르기 때문이다. 20대 때 심사숙고하여 열심히 모은 돈으로 구매했던 명품 가방들을 계속 잘 사용하고 있어서 빨리 사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사고 싶었던 가방을 그때 다 사서 지금은 오히려 명품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어졌다.
나의 소비 욕구를 무작정 억누르고 아끼기만 했으면 경제력이 좋아질 수록 오히려 더 폭주하고 다녔을 것이다.
(3)
나는 돈을 쓰는 것 만큼 모으는 것도 좋아했다. 착착착 계좌에 쌓여가는 금액을 보면 성취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부모님과 함께 거주했기에 기본적인 주거비는 들지 않았고 대다수의 학비도 부모님이 내주셨다.) 돈을 모을 때 지켰던 몇 가지 원칙들이 있다.
저축하고 남은 돈을 썼다.
무조건 이만큼은 저축하겠어! 라고 다짐한 금액은 몽땅 적금으로 묶어버렸다. 적금도 깨면 그만이긴 하지만 만기 전에 적금 깨면 뭔가 자존심 상해서 한 번도 깨본 적이 없다. 아무래도 지금 회사를 다니기 전에는 수입의 변동성이 있다보니 종종 적금 거지가 될 때도 있었다. 인턴 끝나고 백수였던 시기에 적금 넣을 돈이 없어서 아빠한테 빌렸던 기억이 있다.
줄일 수 있는 지출은 확실하게 줄였다.
나는 술 마시는데 쓰는 돈과 택시비를 아주 아까워한다. 그래서 그 둘에 대한 지출은 정말 최소로 했다. 술 마셔야 되는 모임은 종종 불참하고 막차 끊기기 전에 무조건 집가기를 실천했다. 돈은 추가로 버는 것보다는 안 쓰는게 쉽다.
목표 자산을 정하고 꾸준히 트래킹했다.
졸업 이후 입사하고 나서부터는 매년 얼마를 모을 것인지를 정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목표 자산에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는지 체크했다. 초과 달성할 것 같으면 조금 목표를 조금 더 상향해서 조정하기도 하고, 달성하기 어려울 것 같으면 채찍질도 좀 하고.
목돈이 들어오면 스스로에게 보상을 주었다.
살다 보면 어쩌다 보너스 같이 생기는 목돈이 있다. 보통은 그것을 그대로 저축하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돈으로 사고 싶었던 (비싼) 물건들을 샀다. 나 같은 소비형 인간들에게 단기 보상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삶이나 다름 없다.
할부는 절대 하지 않았다.
무이자 할부면 상관없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냥 처음부터 할부에 맛들이지 않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할부를 해야 마음이 편안한 금액이라면 그건 내가 살 수 없는 물건으로 간주했다.
(4)
그렇게 열심히 벌고 쓰고 모으면서 27살이 끝나는 무렵에 1억을 모았다. 1억을 모으고 달라진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다음 1억 모으는 것이 쉬어진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단순한 사실이다. (일반적인 직장인 기준) 내 연봉이 매년 일정 수준 높아지기 때문이다. 소비 수준만 유지한다면 들어오는 돈이 작년보다 더 많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해도 전체 자산은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한다.
투자에 있어서 조금 과감해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한다. 난 천성이 쫄보여서 리스크테이킹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 확실히 전체 자산의 자릿수가 달라지니까 한 종목에 1-2000 만원 투자하는 것이 크게 무섭지 않아졌다. 1억과 9500만원. 500 만원 차이인데 자릿수의 차이에서 오는 무언가가 있긴 하다. 자연스럽게 투자금이 커지니 자산이 불어나는 속도는 증가한다. 물론 잃지 않는 투자를 한다는 가정이다.
돈 모으는게 약간 재밌어진다.
위에서 말했듯 똑같이 살아도 돈이 빨리 모이기 때문에 약간 '어머나 맙소사 이러다가 나 곧 10억 모으는거 아니야?'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때 발생되는 도파민으로 돈을 쓰는 것 보다 돈을 모으는 데 재미를 느낄 수 있다.
(5)
돈을 빨리 벌기 시작했기 때문에 목돈도 남들보다 빨리 모을 수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재테크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은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비상금만 확보된 상태라면 투자는 바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시 20대 초중반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꾸준히 미국 ETF를 사모으는 것으로 투자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모았는지를 열심히 트래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를 썼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소비한 날이 아니라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를 보면 내가 얼마나 생각 없이 쓰는 돈이 많은지 알 수 있다. 이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6)
처음에 언급했듯이 나는 '돈 쓸 때 가장 행복해 보이는 아빠' 밑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아빠의 감정 상태와 나의 감정을 과하게 동기화 시키는 경향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돈이 많아야 행복한 삶, 돈이 없으면 불행한 삶'이라는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이는 내가 더 철저하고 열심히 살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나를 더 힘들게 하기도 했다. 종종 '내가 돈이 더 많았으면 지금 이 불행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고 사실 진짜 돈이 없어서 내 삶에 큰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지나치게 불안했던 시기들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30대는 20대 때보다 더 돈이 중요해지는 시기일 수 있다. 통계적으로 결혼, 출산 그리고 내집 마련을 많이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부모님의 경제 활동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돈 문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모든 문제의 답이 돈이고 돈이 절대적으로 나의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나는 그 어려움들을 성숙하게 해결해 나가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돈이 아닌 요소로 내가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들을 잘 기억하고 그런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에서 시작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