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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리 Jul 16. 2024

20대 회고, (2)가족

가족을 꼭 사랑해야 하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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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어딘가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 '사랑'하지는 않지만 애틋함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 끊어내고 싶어도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천륜. 긍정적인 쪽이든 부정적인 쪽이든 내 감정의 끝을 보게 해주는 존재. 나를 망치는 약점이자 결국 나를 살게 하는 자부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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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 스스로 부모님의 트로피 같은 존재이자 광대의 역할을 자초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항상 자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딸이었으나 그것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역할이었다. 모든 행동과 선택에는 나 자신의 욕구보다는 내 부모님으로부터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예고 진학을 포기하고 외고 입시를 준비했던 것은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함이었고, 사업을 시작했을 때에는 헛짓거리(?)한다고 혼날까 봐 학회 활동이라며 거짓말을 했었다. 뿐만 아니라 갑작스레 남자친구한테 이별을 통보받아 그 충격을 미처 다 추스르지도 못한 와중에도 집에서는 밝은 척을 했다.


나는 적어도 집에서는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어야 했다. 묘하게 나답지 못한 상태로 있어야 했기에 종종 집이 너무 숨이 막혔다. 집에서는 울고 싶어도 마음껏 울 수도 없는 내가 너무 싫고 한심했다.


더더욱 싫었던 것은 아무도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지극히 평범한 수준에서 학구열에 불타는 K-가정주부였고, 우리 아빠는 '그저 예쁘게만 자라다오~'를 외치는 외모지상주의였을 뿐이다. 두 분 다 나를 지나치게 통제하거나 체벌했던 기억은 없고 오히려 나의 모든 삶에 영역에 대해 부족함 없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어떻게 보면 나는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스타일'의 전형에 가깝다.


내가 이렇게 주체성을 잃어버린 미성숙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은 순전히 자의였다. 나는 나의 부모님이 아낌없이 퍼부어주시는 애정과 관심이 좋았고 인정받고 싶었고 칭찬받고 싶었다. 싫은 소리는 듣기 싫었고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기대에 맞는 모범생으로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효도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곧 서른인 현재는 이것이 비정상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안다. 이제는 내가 부모님께 '즐거움, 기쁨, 뿌듯함, 자랑스러움'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없음을 안다. 그들의 감정이 곧 나의 감정이 아니고 그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안다.


결국 '나'라는 하나의 개체로서 건강하게 홀로 설 수 있을 때 가족 구성원으로서도 행복하고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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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3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여동생이 있다고 하면 흔히들 이렇게 물어본다. "동생이랑 많이 안 싸워요?" 그러면 나의 대답은 항상 같다. "싸움이 성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싸우진 않아요. 제가 일방적으로 혼내는 일은 많아요."


실제로 나는 동생한테 잔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다. 평소 실수에 관대하지 못한 편이기도 하고 동생이 남한테 안 좋은 소리를 듣는 상황이 없었으면 해서 다소 엄하게 키웠던(?) 것 같다. 성장기 내내 동생은 엄마보다 나를 무서워했다.


둘 다 20대 후반이 되어 30대와 가까워지고 있는 현재, 나와 내 동생은 서로의 베프(Best friend)가 되었다. 어렸을 때 엄마는 내가 친구들이랑 놀러 나갈 때마다 '네 동생도 같이 데려가서 놀아!'라고 했고 또래와 노는 것이 더 좋았던 어린이 시절에는 엄마의 저 요구사항이 참 싫었다. 그런데 지금은 동생이 친구가 되었다. 그것도 꽤 친한!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한집에 사는 동생이 베프이면 장점이 정말 많다. 집 밖을 나서지 않더라도 재밌는 대화가 가능하고, 즉흥적으로 같이 맛있는 걸 먹으러 나갈 수도 있고, 서로의 옷장이나 화장대도 편하게 공유할 수 있다. 무엇보다 엄마아빠와 관련해서 골머리를 썩고 있을 때에도 털어놓고 고민을 나눌 수 있다.


우리는 타고난 기질이 정말 다른 자매였다. 동생은 털털하고 예민하지 않은 성격이었고 남자 사람 친구들과 농구하거나 장기 자랑에 나가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그와 반대로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차분한 성격 탓에 엄마 친구들의 며느리감으로 찍혔었다.


그럼에도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이상한 구석에서 통하는 구석이 많았다. 중고등학생 때는 둘 다 공부만 하느라 바빠서 우리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잘 통하는 사이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둘 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서로의 취향이나 사고방식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고 우리가 꽤 잘 맞는 사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꼈다.


예를 들면 각자 뚜렷한 취향을 갖고 있는 점, 모든 것에 대해 호불호가 강하다는 점, 사람보다는 동물을 좋아하는 점 등.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클래식과 K-pop을 동시에 열렬히 좋아한다거나, 유행하는 패션 브랜드의 제품은 죽어도 소비하지 않는 것,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대사를 외울 때까지 수십 번씩 돌려보는 것과 같이 덕후 기질과 마이너한 취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둘 다 사회초년생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매라는 관계보다는 친구라는 관계에 더 가까워졌다. 남의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몸소 깨달으며 일종의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겼던 것일까. 고충을 털어놓다 보면 부정적 감정의 밑바닥에 닿게 되는데 동생에게는 그 밑바닥을 보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포장하지 않은 날 것의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은 동생이 유일하다. '너는 날 이해할 수 있을 거야.'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다.



하기야 호적, 유전자 그리고 취향까지 공유하는 사이인데! (그렇지 동생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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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진 않지만 어딘가 애틋하고 좀 웃기기도 하고. 코미디 시트콤 같은 우리 가족. (가족 유튜브 했으면 대박 났을 거임.) 남은 인생도 우당탕탕 왁자지껄 지지고 볶으며 건강했으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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