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감성과 테크 감성의 대결
왠지 지하철에서 이북리더기(e-book reader)를 활용하여 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굳이 돈을 들여 오직 독서만을 위한 전자기기를 살 정도로 책과 테크 기기를 동시에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그 이미지를 갖고 싶어서 전자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카페에서 유독 힙한 스타일의 여자분이 이북리더기로 책을 읽고 계신 것을 보고 '아, 나도 사야겠다. 이북리더기! 나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서야 쓰이는 단어이긴 하지만 3년 전 그날 '텍스트힙(Text-Hip)'을 그에게서 처음 엿보았다. 그날 밤 당근마켓에서 '리디 페이퍼 프로'(현재는 단종된 모델)를 구매하였다. 그렇게 전자책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현재는 상황 및 책의 종류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하여 종이책과 전자책 모두를 소비하고 있다. 한 3년 정도 두 가지 매체를 충분히 활용해 보니 각각의 장단점이 선명해졌다.
*이 글에서 전자책은 핸드폰이나 태블릿 PC 가 아니라 이북리더기(e-book reader)를 통해 읽는 환경으로 가정한다.
(1) 대체하기 어려운 아날로그 감성
종이책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아날로그 감성! 종이 냄새와 책장을 넘길 때 나는 '사락' 소리를 느끼며 책 읽다 보면 잠이 솔솔(?), 은 장난이고. 나는 책 읽을 때 인덱스를 붙이면서 읽는 편인데 취향에 맞는 예쁜 인덱스를 사용하면 시각적인 만족도가 매우 높아진다. 또 하루종일 쳐다보고 있던 컴퓨터 모니터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느낌이 들어서 종이책을 읽는 시간을 좋아하기도 한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종이로 만들어진, 글자 가득한' 책이라는 물건은 생생한 색감을 자랑하는 모니터 화면, 접히는 핸드폰, 나보다도 스마트한 워치와 같은 기기들과는 다른 멋짐이 존재한다. 현대사회는 화려한 기술로 가득한 장비들이 보편적이기 때문에 고작 종이라는 수수한 수단으로 콘텐츠가 제공되는 것이 특이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경험으로 받아들여져서라고 생각한다.
(2) 직접 메모하면서 읽기에 좋다.
종종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책은 책에 직접 줄을 치고 메모를 하면서 읽게 된다. 실시간으로 떠오른 생각을 문장 바로 옆에 바로바로 기록할 수 있으니 편리하다. (이북리더기도 메모 기능을 제공하긴 하지만 반응속도가 느려서 타이핑하는 것이 쉽지 않다.)
(3) 표지 그 자체로 인테리어 효과가 있다.
표지가 예쁜 책은 그 자체로 소비 욕구를 자극한다. 왜 화보 같은 것들만 봐도 촬영용 소품으로 트렌디한 색감과 깔끔한 타이포그래피가 돋보이는 책이나 잡지들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가. 책장에 알록달록한 책들을 쌓아두면 그 자체로 아주 훌륭한 장식품이 된다. 평소 예쁜 걸 좋아한다면 종이 책은 충분히 수집할 만한 아이템이다. (나는 솔직히 표지 예뻐서 사들인 책들도 있다.)
(1) 공간을 차지한다.
예쁜 표지의 그 책도 결국은 짐이다. 사들이면 사들일수록 보관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계속해서 필요해진다. 나의 생활공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늘어나는 책의 개수만큼 계속해서 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은 은근히 스트레스가 된다.
(2) 휴대성이 떨어진다.
나는 책을 수납할 수 없는 작은 사이즈의 가방을 들고 다니는 편이다. 에코백을 든다고 하더라도 무거운 책은 들고나갈 때 아무래도 머뭇거리게 된다. 이렇듯 휴대성이 떨어지니 그 핑계로 책과 더 친해지지 못하는 것도 있다.
(3) 두꺼운 책은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두툼한 책은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사피엔스와 코스모스. 일단 샀는데 너무 두꺼워서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며칠 동안 읽어야 되려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일단 페이지 수가 적은 책들에 먼저 손이 가게 되고 상대적으로 페이수가 많은 책은 계속해서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었다. 결국 나는 알게 모르게 페이지수를 기준으로 독서 편식을 하고 있는 금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1) 휴대성이 좋다.
아이패드보다 훨씬 가벼운 기기 안에 수많은 책을 넣어서 다닐 수 있으니 휴대성 측면에서는 당연히 100점이다. 특히 나처럼 여러 권을 동시에 읽는 병렬 독서를 하는 경우 더욱 유용하다. 장기 여행을 가게 될 때 책은 필수로 챙기는 편인데 나의 캐리어는 여러 권의 책을 담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롭지 않다. 그럴 때 이북리더기가 있다면? 도서관을 통째로 여행지에 가져갈 수 있다.
대부분의 이북리더기는 두꺼운 책보다도 가볍기 때문에 밖이 아니라 집에서 책을 읽을 때에도 손목 부담이 훨씬 덜하다. 한 손으로 볼 때도 무리가 없기 때문에 앉아서든 누워서든 편하게 독서를 즐길 수 있다.
(2) 독서기록이 편리해진다.
기기마다 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가 사용했던 리디페이퍼프로는 책을 읽으며 다시 보고 싶은 문장에 형광펜을 쳐두면 리디 웹사이트에 들어가서 그 문장들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저장된 문장들은 그대로 텍스트를 복사해서 독서일지를 쓰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글자 하나하나 타이핑할 필요가 없었기에 편리했다.
(3) 책 가격이 약간 저렴하다.
출판 업계의 구조상 전자책이 종이책보다 엄청나게 저렴하지는 않다. (실물에 들어가는 비용보다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의 비용이 훨씬 크다고 함.) 그래도 10% ~ 30% 정도는 저렴한 편!
(4) 구독 서비스 이용 시, 다양한 책을 저렴하게 접할 수 있다.
요즘 대부분의 도서 플랫폼에서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구독을 하더라도 모든 책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경우는 구독 가능한 책의 목록에 최소 1권 이상은 읽을 만한 책이 있었다. 한 달에 1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면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꽤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5) 어두운 곳에서도 독서 가능하다.
이북리더기는 비행기, 호텔 등 조도가 낮은 곳에서 독서가 하고 싶을 때 유용하다. 화면의 밝기나 온도 조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환경에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독서가 가능하다. 물론 우리의 눈 건강을 위해 너무 어두운 공간에서 책을 읽는 버릇은 좋지 않다.
(6) 두꺼운 책을 겁 없이 읽기 시작할 수 있다.
대게 전자책을 읽을 때에는 이 책이 얼마나 두꺼운 책인지 모르고 그냥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전자책의 용량이나 페이지 수 정보를 미리 확인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책의 두께만 보고 거르게 되는 습관이 개선된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일례로 앤디 위어의 SF 소설 중 하나인 '프로젝트 헤일메리'는 600페이지가 넘어가는 꽤 긴 호흡의 장편 소설이다. 나는 이 책의 실물을 보지 못한 채 전자책으로 읽기 시작했다. 너무 재밌고 흥미로워서 매일매일 자기 전에 읽었고 일주일도 되지 않아 완독 하였다. 솔직히 종이책으로 이 소설의 존재를 먼저 알게 되었다면 두께감에 압도되어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렇게나 재밌는 소설을!
(1) '책'을 읽는 느낌이 덜 하다.
책은 그래도 종이 냄새, 책 넘기는 소리가 나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추천하지 않는다. 이북리더기 자체가 작은 아이패드처럼 느껴져서 책을 읽는 느낌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2) 이미지가 중요한 책은 읽기 어렵다.
이북리더기는 전자잉크를 활용하기 때문에 흑백 스크린이다. 따라서 이미지가 중요한 책을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는 미술 관련 도서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종이책을 사게 된다.
(3) 이북리더기 구매에 대한 초기 비용이 발생하다.
다양한 제품들이 있지만 생각보다 비싸다. 어느 정도 괜찮은 모델을 사려면 최소 10만 원 중후반대부터 시작한다. 설탕 액정이라 불리는 만큼 연약한 액정 때문에 취급 시 주의가 필요하고 터치 반응 속도도 일반적인 핸드폰이나 태블릿 PC와 비교하면 상당히 떨어지는 수준이기 때문에 '이까짓 게 이렇게 비싸다고?'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종이책은 감각적이고 전자책은 효율적이다. 둘 중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없다. 그러나 나의 독서 습관에는 전자책의 장점들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독서를 취미로 갖게 된 것도 전자책 덕분이다.
일단 이북리더기를 구매하고 나서 독서량이 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휴대성이 좋고 구독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기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잠시 이북리더기가 없었던 시간이 있었는데 확실히 책을 덜 읽게 됨을 경험하였다.
전자책은 물리적인 공간 차지에 대한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책을 찍먹 해볼 수 있다는 것도 나에겐 아주 큰 장점이었다. 막상 구매하여 읽다 보니 기대했던 것과 달라서 도중에 하차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렇게 평생 책장에 꽂혀서 먼지가 쌓여가는 책을 보면 '아 내가 또 돈과 공간과 종이를 낭비했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전자책은 그런 죄책감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
혹시나 이 브런치를 보고 이북리더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처음엔 중고로 10만 원 이하 정도의 기기를 구매하는 것을 추천한다. 생각보다 손이 잘 안 갈 수도 있으니 경험해 본다는 생각으로 투자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나에게는 감각적인 경험과 효율적인 수단 둘 다 중요하다. 따라서 '종이책 vs 전자책'의 대결은 어떨 땐 종이책이 이기고 저쩔 땐 전자책이 압승하는 허무하고 당연한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뭐가 됐든 일단 읽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