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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Dec 23. 2015

기억과 글쓰기

쓸데없이 많은 걸 기억해내는 건 좋은 걸까.

창작의 고통이라 하기엔 너무 거창하지만, 가끔씩은 야심차게 "글을 좀 써볼까?"하고 완벽하게 세칭 끝내고 노트북 앞에 마주앉으면, 결국 멍하니 앉아서 인터넷 검색질이나 하게 된다.

전문 작가도 아니고, 마감에 시달리는 입장도 아니지만 사소한 물건 하나, 스쳐지나가는 시시콜콜한 이야기 하나도 글로 기억하려고 하는 욕심 때문인가보다.


그만큼 기억이란건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영화마냥 메인 줄거리거나

주인공이 아닌 이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잊혀질 수도 있는 나약한 존재 아니던가.

간혹 우연히 스쳐가는 향기거나 귀에 꽂힌 노래 한마디에 강력하게 한방을 훅 치고 들어와 그시절 그때로 돌아가게 하긴 하지만 말이다.


대만가수 주걸륜의 노래 한소절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그 노래 가사를 곱씹던 어느 비가 내리는 저녁으로 돌아가고, 순부두찌개를 먹을 때마다 엄마가 오랜만에 귀국해서 만들어주는 첫끼식사가 떠오르고, 모 브랜드 장미향수를 뿌릴 때면 양다리를 걸치던 한 옛남자친구 놈이 떠올라서(자신의 또다른 여자친구한테 들킬까봐 나한테 이 향수 안 뿌리면 안되냐고 하던)기분이 뭐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포인트가 되는 사물이거나 인물이 아니면 대부분의 기억들은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을 뿐이니, 희미해져가는 순간들을 사진마냥 선명하게 다시 끌어와서 인화해내는건 어떨까 싶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이유는 모르겠지만(알면서도 모르는 척 할수도) 활달하고 밝은 겉모습에 은근히 어두운 내면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기억에 대해 집착하는 걸 나이 서른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테스트도 있지 않던가. "당신은 기차여행을 하고있습니다. 기차머리가 보이는 자리, 기차꼬리가 보이는 자리 중 어떤 걸 선택하겠습니까"

은연중에 기차꼬리가보이는 자리를  골랐는데 테스트 결과는 "당신은 기억을 곱씹는 사람입니다." 뭐 이런 내용의.


십대부터 이십대 초반까지는 싸이 같은 곳에 이런저런 글귀들을 참 많이도 끄적이기도 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건 그렇다 치고 일단 너무나도어두웠다.


사실 알고보면 멋있는 문구로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려고 했던거 같은데 어쩌면 하나같이 칙칙한 분위기었던지...

기억을 되돌려보면 그 시기 사귀었다가 헤어졌던 이런저런 만남들에 대한 환멸 등등.


남녀의 만남 얘기가 나오니 하는 얘기지만,실연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가슴이 죽도록 아픈 이유는 그자식이 날 버렸다거나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는 분노나 적개심보다는 그 죽일놈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이다.


웃기게도 기억이란 역시 사람 마음처럼 간사해서 헤어지게 된 온갖 부정적인건 다 내려놓고, 그사람의 따뜻한 눈빛하나 기다란 손가락 등 자신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던 순간만을 상기시켜준다.  


다 써놓고보니 뭔가 기억이란 답정너 같다.

좋은것만, 좋았던것만 품고있으려고 하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과 모든 일에 무심한 사람이 있고, 그에 따라서 각각 장점과 단점이 따르겠지만

가만히 앉아있어도 눈에 보이는 온갖 사물, 귀에 들리는 온갖 소리와 음악, 코에 스치는 이런저런 내음만으로도 기억을 끄집어내는 전자의 경우는 참 난감하다. 그 많은 기억을 머릿속에 어떻게 저장할지....(참 쓸데없는 걱정이기도 하지)


어떤 동화에선 주인공이 마음에 담고있는 기억이 너무 많고 무거워서 바닷속에 가라앉는다던 결말이던데.


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글을 쓰는걸로 기억들을 덜어내야겠다.

머릿속에서 덜어낸 기억들을 사진처럼 인화하고 출력해서 한장한장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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