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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MO Jan 24. 2021

작은 그릇 안에 담긴 우주

한국 도예를 부활시킨 데 일조한 보원요 이야기

"생각해보면 다른 일은 고사하고라도 오늘의 도예가 일본에게까지 뒤져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싶다. 이것은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가 당면한 첫 과제요, 첫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싸움의 대열에 스스로 끼어든 김기철 씨에게 한결같은 성원을 보내며 아울러 앞날의 그의 발전에 기대를 걸고 싶다."
- 최순우
"놀라운 것은 밝은 갈색을 띤 빛깔이다. 일찍이 다른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희한한 빛이다. 산길에 이슬을 머금고 누워 있는 가랑잎 같기도 하고, 잘 익은 배 같기도 한 그 빛깔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궁금했다. 그것은 더 물을 것도 없이 자연의 신비다.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신비한 조화다."
- 법정 스님
김기철 선생의 도자기를 사랑했던 법정 스님과 최순우 선생

도자기란 무엇인가. 우리가 항상 곁에 두고 쓰는 물건이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급속한 산업화 속에 전통 공예로 만들어진 대부분의 물건들이 공장에서 나온 기성품들로 대체되었으며 도자기 또한 그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도자기 또한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가 일괄적으로 찍어내는 것들이다. 얼핏보면 사람이 직접 손으로 빚어내는 도자기와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도 않다. 형태도 이쁘장하고 색깔도 알록달록한 것이 우리 일반인에겐 안성맞춤인 것들이다.

도자기에 대해 문외한이던 내가 도자기를 예술로 인지하게 된 건 이천 도자기 축제에 갔을 때였다. 설봉공원에서 열린 축제에 가보니 이천의 도공들이 만든 다양한 도자기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들어간 도자기는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 볼 수 있는 도자기들과 확연히 달라 보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도자기들보다 화려함은 덜할지 모르지만 도공 개개인의 사상과 철학이 조금이나마 들어간 도자기를 보니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긴 어렵지만 곁에 두고 싶다는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 여행을 가면서 먼 옛날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 마을에 들릴 기회를 얻었다. 아리타 (有田)・이마리 (伊万里)・가라쓰 (唐津)는 규슈의 3대 도자기 마을로 조선 도공들의 뛰어난 기술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형성된 마을이다. 이삼평 (李参平)은 조선에 있을 때보다 일본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은 도공이다. 사무라이 계급을 받을 정도로 일본에서 높은 대접을 받았지만 그는 평생 도자기를 만든 도공이라 계급을 버리고 규슈의 아리타에 정착하게 된다. 도자기에 사용될 양질의 고령토를 찾아 규슈 곳곳을 헤매던 그는 아리타 주변의 이즈미산 (泉山)에서 고령토를 발견하고 텐구다니가마(天狗谷窯)를 열어 일본 도자기의 전성기를 열었다.


19세기가 되기 전까지 서양과 교역을 하지도 못 한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17세기부터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와 활발한 무역을 펼쳤다.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수출한 일본 자기는 유럽에 대량으로 공급되어 '자포네스크'라는 붐을 일으켰다. 현재도 유럽의 많은 궁전에는 당시에 사들인 일본 자기가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유학 사상의 실천만을 줄곧 외치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일찍이 조선 도공의 가치를 알아보았고 이를 발전시켜 현재 세계에서 인정받는 도예 문화를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일본 도자기의 원조인 한국 도예의 현실은 어떠할까. <작은 그릇 안에 담긴 우주>의 주인공인 보원요는 지헌 김기철 도공이 40여 년간 운영했던 도요 (陶窯)로 한국 도예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법정 스님과 혜곡 최순우 선생으로부터 인정받은 김기철 선생은 의외로 40대가 되어서야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영문학과를 전공해 영어를 가르치던 그가 도자기를 만들기로 결심한 건 일민미술관을 지나치다 나전칠기 부문 무형문화재였던 김봉룡 선생의 고희 회고전을 봤을 때였다.

"나는 사십 중반이 되도록 인생을 헛산 것 같았다. 눈앞이 캄캄했다. 남들은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데…"

김기철 선생이 무턱대고 1977년 경기도 광주 곤지암 산자락에 터를 잡고 보원요를 열었던 건 도예가 아닌 나전칠기 때문인 것이다.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김기철 선생이 만든 도자기는 특별했다. 40년 동안 개인전 12번・단체전 12번을 열었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미국이나 스웨덴에서도 김기철 선생이 만든 도자기를 사랑해 마지않았다. 선생의 몇몇 작품들은 외국의 몇몇 미술관에서 동양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모양만 흉내 낸 미술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기 힘든 것은 미술가의 사상이 작품에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책을 통해 알게 된 김기철 선생의 사상은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처음부터 내가 추구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문화 전통 고유의 도자기를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옛것의 복제가 아니라 뿌리와 줄기는 단단하게 전통에 기초를 두고 이 시대에 또 다른 우리 것을 해보자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였다."

전통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가 만든 도자기에 곧바로 반영되었다. 전기 물레나 전기・가스・기름 가마를 이용하는 대신 전통에 충실하게 용가마를 사용한 것이다. 까다롭고 실패가 많은 용가마지만 육송 (陸松)을 땠을 때 만들어지는 도자기는 돌연변이 같은 빛깔의 변화를 나타낸다. 그는 일 년에 한 번 가마 생일을 기념해 잔치를 열었다.

"언젠가부터인가 내 가슴속에는 서양의 현대적 이색 문화에 짓눌린 우리 문화에 대한 애착이 숨어 있었는지, 그때부터 잔치마당이 끝난 다음에는 우리 놀이를 주선해서 관람토록 했다. 이를테면 송파산대놀이, 남사당놀이, 김금화 철물이굿, 양주별산대놀이, 북청사자놀이 등으로 이어지다가 공옥진 병신춤을 끝으로 1989년에 마감하고 말았다."

1979년부터 시작된 잔치를 통해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선보인 그가 1989년을 끝으로 잔치를 중단한 건 소문을 듣고 찾아온 불청객들 때문이었다. 300여 명 정도 초대하던 잔치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의 사람들로 늘어나면서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밤에 혼자 앉아서 보면 넓게 짜 맞춘 마룻바닥은 흐릿한 불빛에도 바다 물결이 끝없이 출렁이듯 바라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게 할 만큼 피안의 세계를 느끼게 했다. 오죽하면 법정 스님도 몇 차례 이런 우물마루를 놓고 싶다고 하셨지만, 어느 날은 "이생에는 글렀어, 내생에나 소원을 풀 수밖에…"라고 말씀하셨다."

한국 전통을 지키고 보존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보원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가 머물고 있는 거처와 전시실, 작업장에 한옥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10년 동안 애를 썼으며, 건물 바깥에 토방을 짓고 돌탑을 쌓고 울안에 각종 다양한 꽃을 심어 도자기뿐 아니라 보원요 또한 전통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김기철 선생의 핵심 사상이 담긴 위 내용은 1부 <보원요 40여 년의 발자취>에 담겨있는 것이다. 2부 <도자기 전시회>는 김기철 선생이 참여한 전시회를 소개하는 글로 이루어져 있으며, 3부 <천년만년 살 것처럼>은 김기철 선생의 수필로 구성되어 있다. 4부 <보원요 친구들>은 보원요를 찾는 김기철 선생의 친구들이 쓴 글이다. 책의 주제인 <작은 그릇 안에 담긴 우주>는 1부만 읽어도 그 내용을 80% 이상 이해할 수 있으며, 3부를 읽으면 김기철 선생의 사상이 더 와 닿게 된다. 2부는 김기철 선생의 작품이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4부는 친구들이 김기철 선생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보원요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감동이 덜하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도자기로 표현하고자 한 김기철 선생의 작품은 사진으로 봐도 그 아름다움이 전해질 정도다. 식물의 잎사귀나 꽃・열매 등 자연을 소재로 만든 도자기는 그윽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아마 법정 스님이 찬양했던 '법정 찻잔'이 아닐까. 다른 작품에 비하면 소박해 보이지만 간결하면서도 절도가 있는 찻잔의 모습은 그 빛깔과 질감만으로 충분한 감동을 선사했다. 도자기는 쓰임새가 우선이고 거기에 형태미가 따르면 일단 형태로서는 최상이기 때문에 맑고 신선한 백자 잔을 만들고자 한 김기철 선생의 의도가 잘 반영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용가마를 사용해 구워내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을 자연색이 눈길을 끌었다.

"이런 지극히 간단한 기법을 몇 백 년을 두고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다는 것이 납득이 안 갈 뿐만 아니라 의아스러웠다. 말하자면 백자를 하는 데 유약 입히는 작업을 생략하는 그 단순하고도 간단한 발상을 말이다."

유약을 안 입힌 도자기라면 거무튀튀한 흙 색깔을 그대로 드러낼 거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용가마를 이용해 제작된 그의 도자기는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요변이 일어나 세상에 유일무이한 빛깔과 문양을 드러내기도 한다. 법정 스님은 그의 작품을 통해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조화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작은 우주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고도 산업화 시대에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메말라가고 있는 요즘, 그의 글과 작품을 통해 작은 우주를 보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김기철 선생의 사상을 알게 되어 감동을 느꼈지만, 40여 년간 한 자리를 지킨 보원요가 도시 계획 때문에 사라지는 것은 아쉽다. 의외로 김기철 선생이 보원요가 사라지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건 놀라운 일이다. 조선의 도자기 산지였던 경기도 이천・광주・여주, 전라도 강진, 경상도 김해에 존재했던 수많은 가마들이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라진 것과 같은 맥락일까. 어쩌면 김기철 선생이 담담함을 표현한 건 비록 보원요는 사라져서 없어지지만 그가 일으킨 한국 전통 도자기의 혼이 후대까지 이어질 거라는 확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의 뛰어난 도자기를 보고 시샘을 느꼈지만 한국에도 우리 고유의 혼이 담긴 도자기가 있음을 알게 된 후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나와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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