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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제베 Mar 11. 2024

예술은 부르주아지의 것인가?

팬데믹이 시작되고 친구나 지인의 만남이 뜸해졌다. 엔데믹이 지나고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나브로 혼놀을 즐기게 되었다. 최근 넷플릭스에게서 보게 된 <닥터슬럼프>의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동창은 행정의 엮임이고, 친구는 필요의 엮임이라는 분위기의 대사였다. 행정의 엮임은 강제성을 갖는 수동성이고, 필요의 엮임은 자유성을 갖는 능동성이다. 동창이라고 모두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리라. 


사람만이 꼭 친구는 아니다. 평소 좋아했던 독서와 음악 그리고 그림도 좋은 친구라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요즘이다. 혼놀을 즐기기에 예술은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예술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가 말한 '예술 무용지물론'이 있다. 인간은 이성에 의해서  인도되어야 하는데, 예술은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해 사람을 타락시킨다고 했다. 즉, 예술은 감정에 영향을 주어 성격을 약하게 만들고 인간의 도덕적, 사회적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것이었다.


광주의 신경호 화백이 오래전 어느 인터뷰에서 “예술은 부르주아의 것이야”라는 자조 섞인 인터뷰를 기억한다. 한때의 예술은 분명 부르주아가 즐기는 대상이었다. 이름난 예술인과의 교류나 이름난 작품들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기에 드러난 예술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매스미디어 시대에서 예술은 더 이상 부르주아의 것이 아니다. 관심과 취향만 맞으면 누구든 대중예술이든 민중예술이든 고전예술이든 언제든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생활은 날로 편리 해지만 삶의 내용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지금의 세상에서 예술의 그 가치를 한 번 음미해 보는 것도 자기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나 허무주의자 니체도 예술로서 아픈 삶을 치료하자고 했지 않았던가. 김구 선생도 그랬고 말이다.


관련 이야기는 

아제베의 [딜레탕트 오디세이]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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