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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규 Oct 11. 2023

대안학교가 자연 속에 있어야하는 이유

왜 자연이 ADHD어린이를 치유하는가

1.


어제 교사 지인이 몇 가지 묻겠다고 하면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초등2학년 어린이인데, 아직 한글을 능숙하게 읽지 못한단다.


급기야 이 아이가 등교거부를 한다고....


엄마가 걱정이 태산이라고 하면서 상담했다며 무어라 말해야 하냐는 거다.


먼저 내가 물었다.


"아이가 말할 때 발음이 명확한가요? 아님 어눌한 편인가요?"


"어눌한 발음이지요"


"그럼 발달장애로 일단 의심하고 의사의 진단을 받아보라고 하세요"


학습에 어려움이 있거나, 한글을 못 읽고, 단순 덧셈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에....


말소리 발음이 명확하면 단순 학습부진이고,


말을 불분명한 발음으로 한다면 거의 발달장애에 의한 학습장애라고 본다.(내 판단기준)


또한 (증명할 길은 없지만) 내가 만난 발달장애 어린이 경우 모두 외모가 출중했다. 눈이 크고 얼굴 피부가 매끈해서 잘 생겼다는 느낌을 받는다. 혼자 생각에 다운증후군이나 윌리엄스증후군의 외모특성처럼 발달장애(자폐장애)의 경우도 얼굴 생김새에 어떤 특징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계속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그냥 부모의 외모가 출중했나보다 하고 넘어간다)


2.


ADHD는 1970년 대 갑툭튀 질병이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다. 


한국은 2000년 이후로 널리 알려졌다. ADHD 이름을 얻고 나서부터 주변에 ADHD어린이는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정리정돈이 안 되면 질병인가?"


ADHD를 둘러싼 논쟁 중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다. 십수 년 전에 ADHD 판정을 받았지만 대학교수로 잘 지내는 외국의 사례가 다큐 형식으로 방송되기도 했다.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 자기 집을 쓰레기장처럼 만드는 경우다. 자꾸 외부 물건을 가지고 들어와서 버리는 일이 없으니, 집 안에 앉을 자리가 없어져서 물건과 물건 사이에 새우잠을 자는 사람들 많다. 차라리 이런 분들을 ADHD라고 한다면 받아들이겠다.


현재 ADHD 이름표를 단 한국의 어린이청소년은 발달장애 스펙트럼과 잘 구분이 안 된다. 단지 주변 정리정돈이 안 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보다 퇴행을 보이고(나이보다 훨씬 어린 행동을 하고) 화를 자주 과다하게 낸다. 


이건 K-Boy 또는 K-Student의 슬픈 현실이다.(한국적 상황이다)


3.


인류는 에너지를 사용한 대가로 문명을 이루었다.


다른 말로 하면 지속적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우주에서 개인과 집단의 에너지를 사용해서 엔트로피를 낮춰 자연환경에 질서를 부여한 것이 문명이다.(자연의 돌을 굳이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올리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를 써야한다)


소위 산에서 혼자 사는 <자연인>들은 남성 비율이 압도적이다.(ADHD도 남성이 압도적; 남여비 6:1) 산 속의 자연인들은 엔트로피를 낮추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쓸 생각이 없거나 가능한 덜 쓰겠다는 생각이다. 이 분들의 삶을 꾸리는 능력에 어떤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손재주는 도시인들보다 더 좋다.


ADHD로 불리는 어린이청소년(성인도 포함)들도 마찬가지다. 학습능력, 인지능력, 창의력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손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예를 들어보면, 침대 정리하는 것/방청소하는 것/침실과 거실, 화장실, 베란다를 가리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 것/변기 여기저기에 오줌이 묻도록 조심하지 않는 것/사용한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하지 못하는 것, 어쩌다 요리를 하겠다며 부엌에 폭탄을 던지는 것 등)


세상 모든 일이 '이기는 것' 아니면 '지는 것'으로 생각이 굳어있어서 그렇다. 지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겠다는 의식+무의식의 스테레오 작용 덕이다.

9월의 덕풍계곡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

4.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엔트로피 값이 아이들(신체+정서)보다 높다. 


즉 자연 속에서 어린이들은 자기 자신이 이미 에너지를 많이 써서 질서가 부여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아이들 입장에서 자연은 경쟁 대상이 아니며, 승부 프레임 바깥에 있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부모는 물론이고 수많은 조상들과 시간의 중첩으로 자신이 높은 수준의 생명체임을 확인하게 된다. 


자연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고 귀한 목숨인 줄 알 수 있다.


엔트로피를 높여서 좀 자신의 존재가 흐트러져도 더 높은 엔트로피를 가진 자연환경이 다 받아주기 때문에 심리적 이완과 편안한 상태에 머문다.


이것이 자연이 치유의 주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태어나자마자 자연을 겪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며 10년 이상을 산 어린 친구들이 불쌍한 거다. 부모와 캠핑은 자연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무질서에 아이들이 그대로 노출되는 경험이 중요하다. 그것도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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