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 다가오는 지금 새삼스럽게 드는 후회는 '예술에 도전해 볼 걸'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책도 내고 웹소설도 썼지만, 진지하게 예술을 공부해보지 못한건 후회가 된다. 이를테면, 단편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평할 정도의 깊이는 없다는 거다.
학부시절에 연기를 복수전공하고 싶어서 문의한 적이 있는데 실기를 준비해 와야 한대서 막막한 마음에 포기한 일이 있다. 조경학과도 복수전공 하고 싶었지만 당장 돈을 벌어야해서 복수전공 자체가 너무 큰 사치였다. 이루지 못한 꿈들이 콜레스테롤처럼 쌓여서 퉁퉁불어 염증이 일어난것 같다. 30대에는 그래도 시간이 있다는 생각에 늑장을 부렸는데, 40대가 되니 이제 정말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가득하다. 물론 실제로는 열심히 하면 어찌저찌 해볼 수 있겠지만 40대는 사실 누가봐도 늦은 나이니까.
먹고 사는 일이 바빴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내가 후회하는 지점은 이거다. 왜 나에게 더 집중하지 못했을까? 회사에서 상사에게 인정받고 싶어 열심히 했던 시간들이 어쨌든 내게 자산으로 쌓였겠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나는 더더욱 '내가 살고 싶은 대로'살았어야 한다. 하고 싶은걸 하고 사는것처럼 보이는 내가 이런말을 하면 친구들이 놀라겠지만, 그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먹고 살기 위해 회사를 다니길 선택했지만 너무 나를 소모하며 정작 내가 원하는걸 들어주지 못한것 같아서 내게 미안하다.
한예종이 꿈이었던 어떤 날들이 있었지만 먹고 살지 못할것 같아 포기했고, 매일 '해야지'하면서 쓰지 않았던 작품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그때 그 선택을 했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지만 아마도 게을러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혹은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가지 않은 길'을 운운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이 후회는 사실 의미 없는 일이다. 출판계에 첫발을 내딛었다가 이 업계는 어릴때 떠나는게 좋다는 선배의 말에 1년있다 정말 떠났으니 나는 딱 그정도 열정이었던 거다.
어릴때야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와서 보면 재능도 결국은 꾸준히 하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심지어 나는 재능이 있는 편도 아니다. 언젠가 언니가 나에게 이런말을 했다. "너는 딱 반에서 4등 정도의 재능이야." 반에서 4등이면 눈에 띄는 것도, 그렇다고 아예 재능이 없는 편도 아니다. 성실하게 하면 어찌저찌 먹고 사는 정도의 재능일 뿐이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세상에는 수 많은 천재들이 있고, 그 아래에 또 엄청나게 많은 수재(秀才)들이 있다. 30대를 건너오며 내가 뭐라도 되는 사람이라는 헛된 생각은 버렸다. 실은 그래서 더 편안해진 면도 있다.
언젠가 일을 하다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좋은 말을 읽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문인화를 그리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분을 인터뷰한 글이다.
“‘조급해하지 말고 너무 많은 걸 투자하여 자신을 갉아먹지 마라, 예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만족이고 스스로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 자체에 만족한다면 반드시 언젠간 발전과 기회는 온다’라고 학생들에게 종종 강조하곤 합니다.”
'꽃담 전은혜'라는 분이었는데 이 분이 대단히 유명한 분은 아니었지만 저 말은 따로 써두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나는 조급해하고, 많은 걸 투자하지 않으면 결과가 안나온다고 생각하고, 자기 만족 보다는 누가 인정해줄지 급급해하는 면이 더 강했으니까. 특히 예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만족이라는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자기만족. 어릴때는 이런 말이 그냥 흘러가는 말이었는데 어느순간 딱 마음안에 안착해서 계속 맴돈다. 맞아, 예술은 내가 좋으면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가 잡혔다. 도무지 풀리지 않았던 엉킨 실타래에서 실마리를 찾듯, 자기만족이라는 좋은 말이 용기를 북돋아주는것 같았다.
30대가 저 멀리로 가버렸으니, 그 사이에 이룬것은 딱히 없으니 이제는 오히려 부담될 것도 없다. 나이 드는건 이런게 좋은거구나. 무언가를 채워야할것 같은 마음에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젊은 날에는 고뇌와 번민으로 게으른 시간만 보냈었지. 이미 망쳐버렸으니 더이상 부담도 없다. 젊은날에 차근차근 예술적 역량을 쌓아왔으면 좋았겠지만, 그 후회가 밀려들지만 이미 지난걸 어찌하겠는가.
이제서야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기분이 든다. 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라는 법륜스님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나는 그게 안됐다. 아이러니하게 다 망치고 나니까 이제는 예술을 공부할 수 있을것 같다. 내가 만족하기 위해서 사진도, 글도, 그림도, 피아노도 배워야지. 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배추를 소금에 절인것처럼, 축 처진 내 일상도 그런대로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