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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Feb 08. 2021

달리기라는 운동

<태양닮은 소녀>와 한국 영화 속 달리기

 

근래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청춘들에게 달리기라는 활동은 의미화나 상징화를 염두해둔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동시대 청춘을 묘사하기 위한 도구처럼 다뤄진다.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 모든 가능성을 소진한 채로 목적지 없이 수평선 너머로 달리기 시작하는 <버닝> 엔딩 신에서부터, 경쟁 사회에 도태된 이들이 건강함을 동력으로 삼아 재난 상황에 가장 우등한 존재로 뒤바꿈하는 <엑시트>  인물이 보여주는 질주 장면이나 앞서 이야기한  영화  '달리기'라는 운동의 의미망 사이를 배회하는 <아워바디> 달리기를 예로   있다.


시선의 주체로 등장하는 이들이 보여주는 이 운동은 바깥 상황이 주는 불가항력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춘인 자신의 몸만은 건재하다는 증명처럼 받아들여진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인물들이 '동시대 청춘'이라는 맥락을 묘사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데서, 그들의 안간힘어린 모습은  그대로 어항 안에 갇힌 물고기의 발버둥을 보는 모습과 유사하게 다가온다는 데서 이런 영화들을 온전히 긍정하기에 거리감이   밖에 없는 근거가 된다.

 이만희의 <태양 닮은 소녀>에도 달리기는 등장하지만 앞서 언급한 우리 시대의 영화들과 궤를 달리하는 모습으로 느껴져 다소 의아하다.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명희가 부르는 경쾌한 음악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음반이 발매되지 않아 이름을   없는  노래는 시종일관 등장한다)  그대로 등장인물들이 시작부터 끝까지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다고 봐도 좋을 지경이다. 주인공 인영은 해변으로 가기 위해 4 8000원이 필요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하며 달리고  48000원을 훔쳐 달아나는 소년과 소년을 쫓기 위해 인영도 계속 달리며, 인영을 쫓아다니는 남자들도 달린다. (가령 영화 후반부 기타를 들고 뛰기 시작하는 안경  남자의 경우, 그가 인영을 쫓아다니는 친구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우리는 그가  달리는지, 혹은 누구인지  도리가 없다.)

 문제는 인영과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 창윤(신성일) 역시 아내를 살해한 도망자 신세로 등장하지만 인영과 창윤,  사람은 통행금지를 어기고 파출소를 드나들 정도로 느긋하다는  있다.   영화는 사랑하는  연인이 도피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점은 염두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은 느긋하게 연애를 한다. 때문에 <태양 닮은 여자> 극중에 인영이 언급한 대사처럼 무척이나 순진한 영화고  순진함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간 결과다. 창윤의 시선을 인지하지 못하고 여전히 무심하게 달리는 인영의 모습을 감상한다면 우리는 <태양 닮은 소녀> 그려지고 있는 달리기가 의미화나 상징화를 초과해  그대로 '달린다'라는 희열이 주는 감각과 맞닥드리고 있음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이 가능하지 않을까. 정말로 달리기라는 운동의 가능성과 청춘을 보여준 영화는 어느 쪽인가? 아니면 자유로워야할 몸의 활동마저 하나의 증명처럼 보여질  밖에 없는  우리시대의 문제일지도. ( 질문은  나이브한  같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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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은 금두운 님께서 주최하신 
2 #이만희챌린지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https://blog.naver.com/likeacomet/222228305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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