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조일남 Mar 11. 2021

정령의 시간, 동화의 가능성

<운디네>

 "날 떠나면 당신을 죽여야해" 위 대사를 떠올릴 수록 <운디네>는 기묘하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쓴(것이라 추측한) 은유가 눈 앞에 실제 벌어지는 순간, 우리는 오프닝 시퀀스에 언급되었던 말이 은유가 아닌 (영화 상에)실제로 벌어질 사건에 대한 경고라는 걸 인지하게 되고 바로 이때 <운디네>는 이상한 영화로 변모한다.  (혹은 영화를 보던 관객은 그런 영화임을 그제서야 인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기묘함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영화를 전체적으로 떠올려봤을 때, 이는 우리가 개연성이라 일컫는 서사 맥락이 급작스럽게 변하거나 이 영화가 앞서 관객이 인지한 장면들에 혼란을 가하기 위해 지속해서 어떤 효과를 생성하고 있다는 말로 풀어 이야기 할 수 있을테다. 달리 말하면 그건 영화가 관객의 시간에 가하는 의도적인 혼란이라고. 오프닝 시퀀스로 잠시 돌아가보자. 요하네스를 찾아 카페로 간 운디네는 잠수부 모양 피규어가 들어있는 수조를 갑자기 응시한다. 수조에선 크리스토프로 추정할 수 있는 목소리가 운디네를 부른다. 바로 곧이어 크리스토프가 운디네 앞에 처음으로 말을 건넨다. 단순히 묘사를 위해 이 장면을 끌어 온 게 아니다. 이 순간은 목소리라는 사운드가 이미지에 (시간상으로) 앞서 등장할 뿐 아니라, 영화 속 운디네 개인이 감각하는 시공간이란 선형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복수의 시간들이 서로 교차해 난립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힌트다. 우리는 여기서 정령의 시간을 현대 독일 사회 베를린이란 곳에 안착하려는 펫졸드의 시도를 엿볼 수 있다.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이란 감정 혹은 기호가 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시간을 상대배역의 시간과 동일시 해보려는 시도라면, 관객에게 멜로 드라마를 감상하는 일이란 두 대상이 교환하는 시차를 (은밀하게) 감지하는 작업일테다. <운디네>는 바로 정령의 시간(운디네)과 시간을 순행으로 감지하는 크리스토프란 개인의 시간이 교차할 때 현대 독일이란 장소에 동화가 성립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렇다면 왜 베를린인가?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그에 대해 설명하거나 분석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표면적이고 유동하며 흐르는 정화력 있는 물과 결부된 상징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대서양에 대한 것이며, 세상의 또 다른 반쪽이라 생각되는 물 속 삼차원에 대한 것이다. 그곳은 하늘보다 더 안정되고 동질적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중력을 벗어날 수 있다. 새만큼이나 물고기도 사실상 지상의 사슬로부터의 자유를 잘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인간은 자명한 이유 때문에 오로지 하늘의 메마르고 황량하며 푸르른 창공만을 배경으로 상상해왔다. 지중해 시인들은 반짝이는 바다를 보며 바다 표범을 노래하기 보다는 비둘기가 거니는 조용한 지붕이나 삼각돛을 노래해왔다.


앙드레 바쟁 <영화란 무엇인가1: 존재론과 언어> 中


    물론 <운디네>와 베를린을 엮기 위해선 벤야민을 거쳐 이야기해야 할 것이고, <'카리아티드의 노래'-최근 베를린의 건축 논쟁과 발터 벤야민의 로지아>란 김영룡 선생의 논문을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할 지 모른다. 다만 영화 안에 독일/ 베를린이란 장소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이야기 하기 위해 바쟁은 물이라는 요소가 담긴 바다와 강이 그 자체로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일찌감치 이야기한 점을 들고 싶다. 수로와 교차의 장소라는 특수성으로 베를린을 인지할 수 있다면  어쩌면 베를린이란 장소가 정령과 인간의 시간이 교차하고 사랑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적확한 장소일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리기라는 운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