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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Feb 21. 2022

<프랑스>, 2021

브루노 뒤몽

 요즘 유일하게 보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수요일 SBS 방영하는 <골때리는 그녀들>이다. 동일 직업군, 혹은 여타 공통 분모를 가진 여성 출연자들이 풋살 팀을 이뤄  주에  경기씩 치루는  예능은 축구라는 운동을 얼마나  알고있고 모르건 상관 없이, 출연자들이 보이는 감정 분출이나  팀이 시간이 흐르며 점차 능수 능란하게 공을 다루고  운동팀으로 성장하는 모습은  자체로 타인과의 접촉 혹은 대면이 지양되는 요즈음과 비교해볼  하나의 판타지 드라마처럼 느껴진다. 지난 해부터  호평을 받아왔던  예능은    뜻밖에 사고가 발생했다. 조작의혹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경기 결과나 스코어를 조작하진 않았지만, 골이 들어간 순서를 바꿨다는 의혹이 빚어지면서다.  논란이 일자 제작진에선 실제로  순서를 비롯해 연출적 재미를 위해 편집 사실을 시인했고 , 책임 연출자가 사퇴했고 방송 재구성을 위해  주간의 휴식기를 가지기도 했다.


  사건을 바라보며 내가 들었던 감정은 이런 의혹 제기로 인해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이 과연 내가 재밌어 하는 방송이   늦춰져서 심심하단 사실 말고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ㅋㅋ  점이다.  얄밉게 느껴지겠지만 사실이다.  사건과 마찬가지로 프리지아를 향한 논란 또한 비슷한 맥락이라   있다. (진짜 금수저? 라는  대체 무엇인가?) 이미  자체로 인위적으로 제작되었고 편집을 거친 화면들이  자체로 얼마나 진실성을 담보할  있단 말인가.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한심하다며 함부로 돌을 던질  있을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  같다. 어처구니 없는 도식을 제시하자면 진짜라고 믿었던 어떤 감정의 표출이나 혹은 행위들이 실은 가짜 라고 하는(이를테면  순서를 조작한다던가, 방송 편집으로 인해 허구의 정보가 기입된 경우)  토대 위해 세워졌단 사실을 알았을 , 여기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분노, 혹은 배신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것인가.


조금  길을 돌아 얘기해본  같지만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 다소 적확하게  이야기를 한다. (물론 나보다 자세한 설명은 윤아랑 평론가의  비평이 훨씬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https://brunch.co.kr/@jesaluemary047/143)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은 영화 말미 프랑스가 자신이 표지에 등장하는 잡지( 표지엔 그가 가족을 잃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읽다 말고, 오두막 집에 찾아가 성범죄에 연루된 남편과 함께 살았던 아내를 인터뷰하는 장면에 있다. 이때 별안간 인터뷰 도중 프랑스는  편집을 위해 재촬영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인터뷰가 끝난  정면 쇼트로 다시   이전 인터뷰 순간의  장면을 다시금 찍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찍는 의미에서의) 영화에 관한 영화라 이야기 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허위로 구성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내적 논리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실험  영화라 보는 편이 옳다. 주인공 프랑스가 연출, 기획했던 기사들 뿐 아니라, 이 인터뷰 장면을 보고 있으면 그 장면을 전후로 하는 시간들이 모두 허위라는(물론 이건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데 과연 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무엇에 관한 허위일까 생각해보니 그건 인터뷰 당사자의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때에 보인 프랑스가 보인 위로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런 가정도 가능하다. 마지막 장면에 프랑스(레아 세이두)가  샤를을 껴안으며 띄운 미소를 떠올려 보자. 불과 얼마 전 아들과 남편이 죽음에 이르고 방송 조작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 가져야 할 내적 인과라면 저 미소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떤 의미망에 포획해야 할까? 프랑스의 행복을 위한 일종의 정리, 혹은 또 다른 가쉽을 위한 계획의 일부라 받아들이면서 이 영화를 거대한 음모론의 세계관으로 던져버리면 될까? 물론 이런 가정은 개인적인 의심일 뿐더러 이 영화가 의도하고 있는 숨겨진 의도라 주장하느니 퍼즐 놀이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신에 나는 이 뒤몽의 <프랑스>라는 사례를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든다. <드라이브 마이 카> 속에 등장한 인물들이 각자 발화하며 그리는 개인의 일화들이 우리로 하여금 진실과 허구를 구분짓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생각해보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연속해서 이어붙였을 때, 아무도 그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하거나 혹은 의심하는 쪽이 바보처럼 느껴지 도록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프랑스>는 개별 시퀀스들이 그 자체로 어처구니 없는 시간들을 연속해서 이어붙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괴한 사건의 연속이 영화의 내적 구조를 오히려 단단하게 유지한다는 점이(가령 총격전 장면을 떠올려 본다면 총을 쏘고 있는 이들은 대체 어디서 누가 폭격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아무도 죽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떠올려도 바보가 되는 기분이다. ) 그래서 한 편으로 이 영화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정치의 접점을 이으려는 시도들을 보면 조금 생경하게 다가왔다. 예컨대 주인공 프랑스의 이름이 단순히 그가 살고 있는 국가명인 프랑스라해서,(또한 첫 장면에서부터 마크롱 대통령이 등장한다 해서) 그를 프랑스라는 국가를 의미하는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 파악하여 이 영화를 정치 드라마로 환원하는 시도가 이 영화 앞에 얼마나 쉽게 미끄러지는지와 같이 말이다. 오히려 가장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라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 말같지도 않은 자식들이 대통령을 한다고 나온다던지 하는.. ㅋㅋ 죄송..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또한 인위 혹은 허위의 구조로 둘러 쌓인 세계가 아니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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