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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조일남 Dec 13. 2022

<탑> 끝점을 상상하기

 영화 비평이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풀어놓는 일과 다름 없다 생각한다. 이는 지나간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기억이란 느슨한 실에 의존해 다시 미궁을 되돌아가는 정신적 모험이다. 그런데 홍상수의 영화들은 우리가 풀어놓은 이 실타래를 따라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는 여정을 시험한다. 끝에 다다랐을 때, 이것이 끝인가? 혹은 내가 이 영화를 처음부터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하는 문제. 즉 영화의 구조와 시간 구성을 파악하기가 여간 쉽지 않아 않아 문제인 것이다. 말하자면 상영 시간의 끝이 곧 영화 속 세계의 구조가 우리의 인지 체계 안으로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엔딩 시퀀스를 마주했을때 영화 속 세계가 바깥으로 발산하는 감각 경험이 <탑>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홍상수의 영화를 거론하면서 특히 <탑>의 경우, 인물 사이 관계성을 분석하고 주인공으로 대표하는 자아(권해효)를 홍상수와 등치시키는 비평 작업은 죄다 엉터리다. 그런 분석들은 결론적으로 홍상수의 자기변명이라는 하나의 답안지로 수렴한다. 홍상수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의 가쉽거리와 자신을 둘러싼 풍문을 영화 속으로 적극 가져오지만 그건 교란을 위한 장치이지 독해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리고 이는 홍상수의 10년, 20년 전 작업을 보고도 나올 같은 이야기이며 혹은 김민희와의 불륜 가쉽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 위한 악의로 둔갑한 평문인 터라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비평적 무지를 고백하는 비평가의 자기 변명에 가깝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탑>의 주인공을 거론한다면 그건 시간과 장소다. 영화 촬영지인 홍신애 솔트 2호점이 위치한 건물과 영화 시간이 분절된 채로 등장하며 생성하는 양자의 이미지란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탑>에 등장하는 권해효가 한 명인지 혹은 여러명인지 확신할 수 없어 그가 여러명일 것이란 유혹과 반드시 충돌한다. 그러나 이는 현실세계와 너무나 밀접하게 닿아있는 그의 영화적 세계에선 이뤄질 수 없는 이미지의 충돌이라는 걸 알기에 더욱 아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아울러 권해효를 비롯한 인물들이 겪은 시간들이 순행으로 펼쳐졌는지 차마 확신할 수 없는, 이 모순들이 <탑>이란 영화 속에 지속해서 충돌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다 마침내 출발선과 다름 없는 박미소와 권해효의 만남이란 한 점으로 다시 회귀하는 순간, <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으로 붙잡기 어려운 난제가 된다. 나는 이런 문제를 마주하는 순간이 너무 즐겁다. 홍상수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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