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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성 Mar 31. 2020

어제의 꿈, 조금 더 봄

여행이 끝나자 꿈도 사라진 것 같았지만

멀리, 걷거나 뛰어도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바다가 흰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좀 높은 곳에서 그 빛을 1시간 남짓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건 온통 파란색이었다. 바다의 파랑과 하늘의 파랑이 각기 다른 채도와 명도로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피부가 뜨거워질 무렵에는 물속으로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한적한 절벽에 지은 리조트 수영장에서 혼자 보내는 오후였다. 


남국의 아침은 일찍 시작됐다. 일어나서 커튼을 걷어내면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발코니 문을 열었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세상이 점점 밝아지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간 앉아 있으면 곧 아침이 완연해졌다. 하루에 4~5시간씩은 요가를 수련했다. 감각은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돌아왔다.


나머지 시간은 다 책으로 채웠다. 수영장 옆에 있던 비치베드, 발코니에 있던 의자, 깔아놓은 매트 위, 침대 위에서도 읽었다. 책 속엔 누군가의 놀라운 인생, 섬세하고 날카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참혹한 전쟁과 인류의 본질에 대한 성찰, 인간과 마음에 대한 깊은 이해 사이를 넘나들며 여행하던 시간이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웬만하면 뭘 사지 않았다.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을 만큼 완벽한 하루를 누리고 있었는데 돈은 자꾸만 남았다.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매일매일 충만하게 하고 있었다. 하루 24시간에 온전히 내 것이었다. 영원히 이렇게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지? 하루가 이상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제는 하루가 18시간 정도였는데 어제는 딱 2시간 만에 해가 졌다. 오늘의 해는 1시간 만에 서쪽 바다로 떨어졌다. 뭉근한 바람이 한 번 휙 불더니 밤이 되었다. 잊었던 조바심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나는 쫓기고 있었다. 아까는 분명히 발코니에 앉아있었는데 숨을 한 번 쉬고 나면 수영장 옆이었다. 매트 위에서 흘린 땀이 점점 커지더니 거대한 물이 되었다. 나는 물속으로 지체 없이 뛰어들었다. 그 안에서 고래처럼 숨을 쉬었다. 뭔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절반은 체념한 채, 이유는 모르는 채, 나는 물속에서 자유로웠다.


“안녕하세요, 현재 시간은 오전 7시 20분입니다. 오늘은 최저 기온은 영상 3도, 최고 기온은 영상 12도입니다. 오늘의 주요 뉴스는…”


여기는 서울, 이 소리는 알람, 나는 어느새 침대 위였다. 꿈처럼 달콤했던 남국의 시간들은 모조리 꿈이었다. 시원한 물을 한 잔 마시고 몸을 씻었다.


지난겨울, 태국의 어떤 섬에서 약 2주 동안 머물렀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 사이에서 가까스로 비운 시간이었다. 떠나니 한적했다. 꿈처럼 자유로웠다. 수영과 책, 요가와 산책으로 가득 채운 하루. 머리와 마음과 몸을 동등한 비율로 쓰고 꼭 필요한 만큼만 먹었다. 돈은 아주 조금만 썼다. 모자란 게 하나도 없었다.


서울은 결핍의 도시였다. 더 많이 가져야만 가까스로 성공에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이미 성공한 것 같은 사람도 여전한 갈증 속에 있었다. 언제까지 달려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채 쓰러지기 직전까지, 어쨌든 빠르게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도시. 벗어나니 좀 다른 삶이 있었다. 이미 벗어난 사람들, 자기만의 트랙을 달리는 사람들도 여럿 만났다. 같이 수련했던 요가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호주에선 변호사였어. 그러다 세상엔 좀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지금? 행복해. 충분히 행복해."


그러니까, 어제의 꿈은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몽롱하게 묻고 싶은 꿈이 아니었다. 분명히 소유했던 현실을 꿈에서 다시 본 것이었다. 어떤 일상이 나를 충만하게 하는지 다시 한번 알려줄 테니 마음껏 살아보라는 잠재의식의 조언 같기도 했다. 휴가가 끝나자 꿈같은 일상도 다 사라졌지만 아무것도 허무하지 않았다.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은 아침, 서울은 어제보다 조금 더 봄이었다. 


글/ 정우성  


*<sytle H> 3월호를 위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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