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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형 Feb 26. 2022

'나중에'라는 건, 없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바쁠 '나중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일의 특성상 무언가를 읽을 일이 많습니다. 아니 어쩌면 읽어야만 하는 강박에 시달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글, 잘 모르지만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읽어야 할 것 같은 글 등, 제게는 지나가는 모든 글들이 괜히 아쉽습니다.


다들 비슷하겠지만, 그런 글들은 주로 페이스북에서 많이 만나곤 합니다. 보통 그때는 바쁘니까 바로 읽지 못하고 '공유하기'로 제 담벼락에 글들을 모아두곤 했습니다. 페이스북을 잘 안쓸 때에는 즐겨찾기를 도와주는 앱들을 깔아 한 데 모아두기도 했습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읽어야 할 글들은 많은 것 같은데, 이 글들을 한 곳에 모아둘 곳이 없어서 북마크 앱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예전에 썼던 앱을 다운 받았는데, 이게 웬걸. 그 안에 이미 제가 몇년 전에 수북하게 쌓아 둔 글들이 있더라고요. 단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 없는채로 말이죠.


'나중에 읽어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나중'이 언제인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도 쌓아둔 글들을 쭉 보며, '나중에 읽어야지' 라고 생각하고는 쌓아둔 글들을 보며 흐뭇해 하기만 했으니까요.


가지지 않았는데 가진 느낌, 읽지 않았는데 읽지 않은 이 느낌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중에' 라는 단어가 무슨 뜻일까 궁금해지더라고요. 사전을 찾아보니, 세 가지의 뜻이 나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제가 생각한 나중은 첫 번째 뜻이었을 겁니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글을 반드시 읽어야지. 그런데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는 해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아까 일하면서 '나중에' 하기로 한 일도 해야하고요, 아내가 부탁한 '좀 있다' 해야할 일도 해야합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에서 가장 바쁜 나는 '나중의 나'입니다. 지금은 해야할 일이 하나지만, 나중의 나는 지금보다도 할 게 많고 바쁜 가여운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중의 나에게 일을 쌓아두다 보면, 결국 세 번째 뜻인 '맨 끝'으로 일을 미뤄두고 있는 나를 마주합니다. '얼마 있다 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미뤄둔 '나중의 것'들은, 해야할 일 다 하고, 놀거 다 놀고, 쉴거 다 쉰 다음 그제서야 비로소 하게 되는 맨 마지막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뒤로, 나중에 읽는 글은 없어졌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좋은 글을 마주했다면 그 바쁜 틈을 쪼개어 그 글을 읽었습니다. 내게 도움이 되는 글인지, 내가 다시 읽고 싶은 글인지를 판단하는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바빴지만, 글들을 다 읽고도 할 일을 다 해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나중보다, 항상 지금이 옳았던 것입니다.


이제 나의 북마크앱에는 읽었는데 좋았던 글들이 모여져 있습니다. 나는 이제 읽지 않은 글을 읽을거라고 믿는 내 자신을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내 북마크앱은 정말로 가득찼습니다. 내가 아는 모든 내용들로요.


나중에 읽기로 했던 '글'이라는 글자 자리에 '글' 대신 다른 것들을 넣어봅니다. 나중에 만나기로 했던 '그', 나중에 가보기로 했던 그 '곳', 나중에 해보기로 했던 그 '것'. 어쩌면 나는 글처럼 그것들을 맨 마지막에 해야하는 일로 미뤄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 때 했어야 했는데. 그 사람, 그 곳, 그 것들은 즐겨찾기도 해둘 수 없는데. 어쩌면 다 지나간건 아닐까. 


마음이 조금 헛헛해졌지만, 이제 나는 세상 모든 일들을 즐겨찾기 해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는 이제, 바로 그때 하는 사람입니다.


* 글은 뉴스레터 검치단 Playlist & Letter 에서도 함께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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