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위키 읽는 걸 좋아합니다. 나무위키가 아주 정확한 정보를 다루고 있지 않는다는 것은 압니다. 혹자는 한 80%만 믿으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위키를 찾는 이유는 읽기 쉽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알고 싶은 대상에 대해서 80% 정도를 아주 쉬운 방법으로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죠.
나무위키를 읽을 때 가장 신나는 순간은 새로운 물건을 샀을 때입니다. 모든 물건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사연이 없는 물건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물건을 사기 전, 저는 모든 물건의 모델명을 나무위키와 구글에 검색해 봅니다. 겉으로는 맹숭맹숭해 보였던 물건도, 나무위키에 모델명이 검색되는 순간 갑자기 가슴과 지갑이 선덕거립니다.
이야기란 건 사실 별 게 아닙니다. 골동품을 모으는 제게 이야기라는 건 대부분 역사입니다. 역사가 담긴 물건엔 마음이 달라집니다. 눈앞에 있는 낡은 워크맨이 세계에서 최초로 나온 워크맨이라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우연히 마주친 필름카메라가 앤디 워홀이 썼던 카메라라면 달라집니다. 그 카메라에 앤디 워홀의 지문쯤은 없어도 됩니다. 그가 썼던 것과 같은 모델이라면, 그가 그 모델을 들고 다녔던 사진 한 장이라도 있다면 충분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쌓여서 좋은 안주가 됩니다.
'와, 필름카메라 찍으시는군요.'
'아, 예.(처음부터 대화를 받아선 안 됨)'
'카메라가 참 멋져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카메라입니다.(이 순간을 기다려왔음) 코니카 C35라는 모델인데, 앤디 워홀이 들고 다녔던 모델이라고 해요.(약간 거리 둬서 말하는 게 포인트) 1975년에 처음 발매됐고요. 엄청 비쌀 것 같지만 또 그렇지 않아요. 당시에 워낙 많은 수량이 팔렸었거든요. 아, 물론 이렇게 상태 좋은 양품을 구하는 게 쉬운 건 아니긴 하죠.(조금의 자부심이 필요함) EF 모델이랑 AF모델이 있는데 제가 갖고 있는 건 EF 모델이고...(이 이하로는 사실 안 들어도 됨)'
반대로 이야기가 깃들어서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예컨대, 아내와 신혼여행에서 갑자기 필름사진을 찍고 싶어 충동적으로 산 오래된 필름카메라는 당근에 나갈 수 없습니다. 가끔 아내는 제 서재의 책장을 보며 새로 들어온 컬렉션들을 살펴(검열)보곤 하는데, 이렇게 추억이 깃든 물건들이 보이면 순식간에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카메라를 사던 날 얼마나 바람이 많이 불었는지, 알고 보니 필름이 안 감겨 있어 사실은 허공에 대고 셔터를 날린 일을 두고 얼마나 웃었는지, 필름을 감다가 필름을 끊어먹어서 옷 속에 달걀처럼 카메라를 품고 현상소까지 가는 동안 얼마나 초조했었는지와 같은 이야기들은 나무위키에 적혀있지 않지만 물건엔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물건은 물건이 갖고 있는 물성 그 자체에 더해 서사가 입혀질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두 가지가 없다면 물건은 필요 없어집니다. 단순히 물건이 고장 나고 쓸모 없어진 순간에 더해, 물건에 묻어 있는 이야기가 얕을 때나 그 이야기와 더 함께하기 싫을 때를 두고 '필요 없다'라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앤디 워홀이 썼다는 그 카메라가 고장 나서는 안 되는 이유도, 아내와 함께 산 필름카메라가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와서는 안 되는 이유도 아마 같은 것이겠죠.
사람도 같지 않을까요. '필요 없어진' 사람들이 유독 많아진 것 같은 삼십 대의 요즘엔 결국 사람 관계도 비슷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나도 누군가에겐 소리소문 없이 당근행이 된 사람이겠지요. 그래서일까요, 물건을 사고 들이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일은 예전보다 더 어렵고 신중함이 필요한 일이 됐습니다. 겉모습만 보고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없다는 만고불변의 이치를 자연스레 깨닫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도 나무위키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다면 사람을 가려 사귈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일은 물건을 사는 일처럼 간단하지 않아서 나무위키엔 적혀 있지도 않고, 적을 수도 없습니다. 내게 맞는 사람은 겪어봐야만 알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자꾸 겉으로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무위키에는 적혀있지 않지만, 나도 누군가에겐 앤디 워홀의 카메라이자 세상에 처음 나온 워크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코니카 C35 같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체력과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1990년에 나온 모델 중 얼마나 손에 꼽는 잘 관리된 모델인지, 그래서 그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알아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돌이켜보니. 나는 물건을 산 게 아니라, 이야기를 샀던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이야기가 가득한 사람이 되는 일은 어려워서, 조금은 간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들을 사들였는지도 모릅니다. 그 물건들의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가 되는 것만 같아서. 그러면 나도 앤디 워홀 같은 사람이 될 것만 같아서.
골동품 모으는 취미는 조금 줄여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풍성하게 만드는 일엔 맥시멀리스트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도 당근마켓을 들락 거리며 골동품을 모으는 내게 남기는 따끔한 조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