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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형 Feb 20. 2023

흘러가는 세상 속 모든 것들을 붙잡아보는 일

시간이 너무 빠르다고 느껴질 때

소싯적 책을 낸 적이 있다는 이유로 아직도 누군가에겐 종종 '작가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립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뻐렁치는 이 호칭은 멋모를 때에는 설렘을, 어느 시점이 지나면 가슴과 어깨를 짓누르는 물에 적신 솜 같은 압박을 주기도 합니다. 


'안녕하세요, 고재형 작가입니다.'와 같은(쓰면서도 견디기 힘든) 말은 개인적으로 다소 자의식이 과잉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경지에 이른 이, 쓰는 것이 직업인 이, 아니면 직업에 준하는 수준으로 열심히 쓰는 이뿐입니다. 그게 아닌 자가 스스로를 작가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그저 작가가 굉장히 되고 싶은 어떤 이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누군가를 간편하게 대해버리는 것에 익숙하고,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예컨대 '너 책 냈잖아'와 같은) 작가로 불리는 순간은 심심치 않게 생겨납니다. 평소 같을 땐 손사래를 치며 스스로가 작가임을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라는 호칭의 무게를 이겨내기 위해서 자각을 갖고 살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요즘처럼 글을 써야 할 때입니다.


불려지기 부담스러운 호칭으로 불릴 때, 그러니까 호칭에 내가 아직 걸맞지 못한 뒤쳐진 인간일 때 할 수 있는 최선은 빠르게 만회하는 일뿐입니다. 글을 자주 쓰지 못했는데 작가라고 불리고 있다면 많이 써야 합니다. 글이 아니라 똥을 싸내고 있는 것 같다면 열심히 좋은 글을 섭취해 쾌변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험 상 그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방법은 삶의 모드를 '흘려보내기'에서 '하나씩 다 잡아보기'로 바꾸는 것입니다.


글을 매주 써야 하는 사람이 되면, 글감을 찾아야 하는 숙명을 받게 됩니다. 글감이란 것은 갑자기 앉아있다가 툭 하고 떨어지는 감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글감은 치열한 삶의 현장을 뚫고 지나가고 있을 때 문득 발견하게 되는 뻘밭 속의 키조개 같은 것입니다.


뻘밭에서 키조개가 나오는 구멍을 찾아내기란 쉬우면서도 어렵듯이, 일상 속에서 글감을 찾아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해 바다를 노을을 보기 위해 간 사람과 키조개를 캐러 간 사람이 바라보는 바다는 다를 것입니다. 뻘밭에서 구멍을 찾아내기 위해 평소엔 눈여겨보지 않던 진흙밭을 세심하게 쳐다보는 일은 마치 일상 속에서 글감을 찾아내는 일과 같습니다.


그래서 글감을 찾아내야 할 때에는 일부러 자가용을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앞만 보며 시속 80km/h로 스쳐가는 자가용에서는 글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감을 찾는 일은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길을 건넙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좌우도 살피고, 그런 김에 요즘 사람들의 차림새도 살핍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같은 계절 속에서도 서로 다른 두께의 옷차림으로 날씨를 대하는 저마다의 차이를 보고 있자면 하나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입춘이 지나고 새싹도 움트는 초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아직도 속을 내놓기 싫어 두꺼운 옷차림을 챙겨야 하는 늦겨울이기도 한가 봅니다.' 이 문장은 다시 제게로 와서 한 편의 글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되고, 그런 느낌이 오면 바쁘게 메모장을 켜서 글감을 잡아둡니다.


사진을 찍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를 타면서 찍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문철의 블랙박스에 보낼 수 있는 영상들 뿐입니다. 세상 속의 다양한 모습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걸으면서, 느리게,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풍경을 여러 각도로 바라봐야 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중에는 그 무엇도 잡아낼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작가라는 호칭을 얻게 된 덕에 알게 된 삶의 이치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글과 사진은 모두 느리게 가던 중에 나온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씩 다 잡아보는 삶의 태도 덕에, 저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남긴 것들이 많습니다. 남들에게는 부끄러워 잘 보이고 싶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못난 생각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발견하고 깨달은 나만의 삶의 철학들. 남들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내 눈에는 보여 남겨놨던 세상 어느 한 구석의 썩 아름다운 것들. 사소해 보이는 삶의 조각들은 또 어떤 인고의 시간을 지나 글이 되고, 운이 좋으면 다른 사람들이 읽어주는 영광도 얻습니다.


삶이 너무 후딱 지나가는 것만 같다면 최근에 내가 무슨 글을 썼고 어떤 사진을 찍었는지 살펴봅니다. 남긴 글도 없고, 찍은 사진도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다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의미 없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만 같은 시간 속에서도 잡아내어 내 앞에 남겨둘 것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낚아채서 앞에 앉혀두지 않으면 흘러가는 게 삶일지도 모릅니다. 


어제는 이제 170일 즈음된 제 딸의 사진을 정리했습니다. 요즘은 휴대폰이 좋아서, 제 딸의 얼굴을 자동으로 인식해 몇 장의 사진이 있는지 알려 줍니다. 170일이 된 시간 동안 2,000장 가까이 되는 사진이 나옵니다. 나는 하루에 열 번이고 그 아이의 모습을 잡아두고 싶었나 봅니다. 2천 장의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보며 나는 또 훌쩍 두어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어쩌면 이 아이에게만은 사진작가라고 불려도 되지 않을까요. 이 아이의 유한한 시간들을 무한한 존재로 잡아두는 그 사진들처럼 더 많은 글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나는 세상의 작고 소중한 순간을 꽤나 잘 잡아두는 괜찮은 작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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