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 사람의 변화
프랑스의 철학자 기 드보르는 그의 저서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현대 사회를 스펙타클의 사회로 명명하면서 과거 인간들의 특권적 감각은 촉각이었는데, 현대 사회에 영상 매체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주된 감각이 시각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사람들은 세계를 만지고, 직접 경험한 데 반해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세계를 관조하고 이미지로 전달된 정보를 무기력하게 수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매체가 바뀌면 사람의 지각 방식 또한 변화한다. 특히 영상의 등장은 사람들의 지각 방식과 사유, 삶 전체에서 다양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미술관에 갔을 때와 영화를 시청할 때를 비교해보자. 우리는 미술관에서 대개 고정된 작품을 관람하면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계속해서 사유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면서 색감이 참 예쁘다, 붓 터치가 감각적이다, 고흐는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 등으로 자유롭게 생각이 연결될 수 있는 것과 같다. 내가 무엇을 떠올리고, 얼마나 오랜 시간 생각하고, 어떻게 사유하는지 등의 문제는 규제받지 않는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회화 이후에 사진이 등장한다. 사진은 초기에 주로 현실의 모습을 온전히 담는 데에만 사용되었다가 범죄 기록을 남기는 증거로, 연출을 통한 작품 사진 등으로 그 역할이 확장된다. 사진의 역할이 변화하면서 사진과 함께 적히는 설명 문구가 아주 중요해진다. 특히 화보 사진이나 예술사진에서 작가는 관객들에게 짧은 문구를 통해 작품 해석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지침은 영화에서 더욱 강압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영화는 장면과 장면의 연결을 통해 한 장면의 의미를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어린아이의 슬픈 표정이 나오고 그다음 장면으로 아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강아지가 죽어있는 모습이 등장했다고 하자. 우리는 아이의 슬픈 표정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강아지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이 장면이 아이가 슬퍼하는 이유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영화에서는 한 장면이 잠시 등장하였다가 금세 다른 장면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을 제한하는 것이다. 우리는 특정 장면을 보면서 생각을 확장시키려다가도 화면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다시 그 장면에 대한 생각으로 전환해야 한다. 영상 매체는 계속해서 사람의 정신을 분산시킨다. 현대 사회에서는 장면을 더욱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3D 영화,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과 후각을 사용하여 한 장면을 표현하는 4D 영화 등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정신을 분산시키는 매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전달 매체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주목해 볼 만하다. 영화는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흥미롭게 보게 하기 위해 시각적으로 더 자극적인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파괴적인 것들을 요구한다. 실제로 수많은 영화에서 차로 추격전을 하거나, 건물이 폭발하거나, 외계인이 등장하는 비현실적이고 괴기스러운 모티브를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영화의 제작 방식 또한 영화와 현실과의 차이를 극적으로 사용한다. 영화는 크게 촬영과 편집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이 모든 단계에서 그 자체로의 현실은 왜곡된다. 촬영을 할 때 카메라는 클로즈업, 고속촬영, 무빙 등을 통해 현실을 더욱 극화하여 담아낸다. 편집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실 깊숙이 침투했던 기계들, 카메라와 조명들을 없애고 가장 현실적이지 않은 장면들을 가장 현실적인 것처럼 만들어 낸다. 한 달 전에 촬영한 장면과 어제 촬영한 장면을 연결하여 하루에 일어난 일처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편집 과정에서 시공간의 이동은 기본이다. 최근에는 컴퓨터 그래픽 등을 사용하여 없던 건물도 만들어내고, 폭발하지 않는 차도 폭발하게 만들 수 있다. 영상 속에서 비현실과 현실의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는 것이다.
(영화) 다크나이트
영화는 사디즘적 또는 마조히즘적 망상들이
과장되게 발전한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에서 그러한 에너지들이 자연스럽고
위험한 방식으로 성숙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영화로 인한 사람들의 정신 분산, 영화 안에서 미묘하게 드러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 등을 통해 사람들은 정신이상자, 광인의 의식, 환각이나 꿈에서의 지각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사람들을 충격을 받는다. 충격은 극화되면서 사람들에게 현실을 더 생생하게 인식하게 하는 교육 효과를 제공한다. 또한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던 괴기스러운 에너지를 해소할 수 있다.
(영화) 이터널선샤인
미셸 공드리는 영상의 특징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영화감독이다. 그의 대표작 이터널 선샤인에서 남자 주인공 조엘은 갑작스럽게 겨울 바다를 찾는다. 그곳에서 그는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여자 주인공 클레멘타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알고 보니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과거에 연인 사이였고, 이별 뒤에 라쿠나사라는 회사에 찾아가 서로의 기억을 지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드리는 만나고, 사랑하고, 아프고, 잊혀지는 이 뻔하디 뻔한 일련의 과정들을 영상 효과를 통해 참신하게 표현한다. 플롯의 재구성을 통해 영상 안에서의 시간은 뒤틀리고, 몽환적인 모티브들이 난입한다. 조엘이 자신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기억 속 인물들의 얼굴이 녹아내렸다가 다시 생겨나기도 하고, 실내에서 비나 눈이 내기리도 한다.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장면들의 연결, 비현실적인 것들이 산발적으로 등장하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하나의 꿈을 꾼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터널 선샤인’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을 지우는 것’은 사랑을 경험했던 사람이라면 거의 모든 사람이 한 번씩은 꿈꿔왔던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이 기묘하고 이질적인 영상들의 조합으로 표현되었고 사람들은 충격을 받는다. 영화가 다 끝나 현실로 돌아왔을 때, 현실에서의 사랑은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비현실적인 자극이 현실에서의 사랑을 더욱 잘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선사하는 것이다. 영화는 가상의 세계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효성을 가지는 까닭은 이 때문일 것이다.
“너도 사랑 지상주의자니?
사랑은 언제나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을 줄 거라고?”
“고통과 원망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불행도 주겠지.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낼 힘도 더불어 주겠지. 그 정돈돼야, 사랑이지.”
<괜찮아, 사랑이야> 중에서
*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중심으로 현대 사회에서 예술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벤야민이 그러했듯 예술 가운데에서도 ‘영화’에 주목하였습니다. 예술로 인한 변화 대상에 따라 글을 분류하여 예술의변화, 사람의 변화, 사회의 변화로 총 3편의 글이 이어집니다.
주텍스트의 글을 요약정리한 부분은 인용 표시를 하지 않았으나, 원문을 그대로 옮겨온 경우에는 인용 표시를해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