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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라 May 21. 2024

[부모되기] 2. 시험관시술 1

꼭 그렇게라도 아기를 낳아야겠어?

 해가 바뀌고 다시 한번 도전을 해보자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다. 2022년은 호랑이의 해니까 뭔가 호랑이 기운이 나한테도 올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들었다. 21년 말에 델타바이러스로 추정되는 코로나도 걸리고 격리고 끝났겠다, 이제 내가 생각한 임신만 하면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 정도면 상당히 양호한 거지 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도 자연임신이 될 것 같다는 강한 믿음? 이 생겼다.


 그때쯤 나는 알 수 없는 간헐적 복통이 생겼는데, 위경련이 일어나듯 간헐적으로 배가 아팠다. 조금씩 쓰리던 게 점점 심해져서 우측 하복부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음식을 잘못 먹은 것도 아니고 시술도 쉰 지 몇 달이 지났는데 도무지 왜 아픈지 모르던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토요일 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119를 불렀다.


 열이 39도까지 났다. 우측 하복부가 아파서 왠지 맹장염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구급대원도 비슷하게 진단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충격적인 것은 코로나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열이 39도인 상태에서는 아무 응급실이나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119를 부른 건 신의 한 수였다. 그냥 집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갔으면 쫓겨날 수밖에 없었을 거다. 새벽 2시에 도착한 구급차는 1시간 동안 전화를 돌려서 격리 응급실을 기다렸고 집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대학병원에 한자리가 나서 그쪽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번 달 임신이 아닐까? 하는 기대로 진료를 받고 싶지 않았었다. 응급실에도 그 말을 해줬는데, 소변검사를 하니 비임신이 떴다. 인하자마자 바로 ct 찍고 급성충수염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맹장염이라니! 지금 이 나이에도 맹장염이 걸리는구나.... 하필 왜 지금일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일주일 정도 입원하고 퇴원했을 때,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알 수 없는 복통은 사라진 것 같았다. 맹장염이라니! 그러고 항생제 부작용이 와서 위막성대장염에 걸려 이주일 정도 더 고생을 했다. 병원에서는 수술 부위가 아물 때까지 2달 정도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이 때도 난 임신은 그래서 언제 해야 하지 하는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미 나에게 임신과 출산은 장기 미해결 과제로 들어서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징징댔고 남편한테도 징징댔고 나 자신에게도 징징댔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는 뭔가 자연임신이 가능할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스멀스멀 자라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매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계속된 실패와 병원에서 말한 수술 후 두 달이 지나서, 성격 급한 나는 시험관을 하겠다고 했다. 인공수정도 자연임신도 안될 게 뻔해서 남편한테 그러자고 했다. 남편은 이렇게 빨리? 하면서 의아해했지만 다른 난임시술을 다 해봤으니까 최고단계인 시험관을 빨리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시험관 시술은 이렇다. 여자가 할 일은 난소를 자극해서 난자를 여러 개를 만든 다음 채취를 한다. 남자가 할 일은 사정으로 정자를 뽑아낸다.(남자는 이게 끝이다..) 이렇게 채취한 정자와 난자를 약품처리해서 건강한 애들만 남긴 다음, 시험관에서 수정을 시킨다. 거기서 정자 난자가 1:1로 정상수정된 수정란만을 자궁에 바로 이식하거나, 냉동시켜 둔 다음 필요한 때에 맞춰서 자궁에 이식한다.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난자를 많이 많이 만들어 낸 다음 뽑아내는 거네. 오케이 하기로 했으니까 완벽하게 해 보자!


 그렇게 마음먹은 시험관은 인공수정이랑은 확연히 달랐다. 주사 맞는 횟수도 더 많았고 먹는 약도 많았다. 부족한 영양분을 보충해야 돼서 맞아야 하는 다른 주사도 많았다. 난포를 자라게 하는 주사는 배에 맞았는데, 이건 냉장보관을 해야 하고 매일 일정한 시간에 스스로 주사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 주사할 자신이 없어서 매일 출근 전에 병원으로 가서 주사를 맞았다. 병원이 회사와 가까워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 2주 정도 흘렀는데, 한 달에 한 개 자라는 난자가 여러 개가 자라서인지 배가 빵빵하고 숨쉬기가 힘들었다. 거기에 짜증은 덤. 이번만 버티자 이번만 버티면 돼, 처음이자 마지막 난자채취가 될 거야 이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대망의 난자채취날! 전신마취를 하고 채취하는 거라서 별로 아프지도 않고 괜찮을 거라고 했다. 8시에 채취실로 들어갔는데, 그날 채취 환자가 9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채취를 한다고? 그제야 난임부부가 많다는 게 실감되었다. 그렇게 내 차례가 돼서 수술대에 누워있다가 잠들었다.


 눈을 떴다.

 나는 미친 통증으로 죽을 거 같았다. 8시에 들어갔는데 정신 차려보니 10시. 다른 환자들은 다 집에 갔다고 했다. 나는 왜 이리 아프냐고 물어보니 사람마다 다르다고만 했다. 조금 있으면 괜찮겠지 괜찮겠지 생각했는데, 정말 너무 아파서 눈물이 다 났다. 결국 진통제와 영양제를 맞고 잠이 다시 들었는데, 그때 출혈이 너무 많이 나서 나의 헤모글로빈 수치는 6까지 떨어졌었고 얼굴이 시허옇게 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채취한 의사가 집에 가지 못하고 계속 내 옆에 있었다고 했다.

  집에 가려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오후 4시 반이었다. 의사한테 제일 먼저 물어본 말이 그래서 난 잘 채취되었나요? 였다. 힘들게 채취를 해도 다 죽어버리거나, 수정이 안되거나, 수정은 됐는데 냉동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는 말이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고통 속에서도 정상적으로 채취되었고, 신선이식도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 이제 되는 거야! 이쯤이면 양호하지! 빨리 신선이식을 해서 장기 미해결과제를 해결해 버리자. 이런 생각이 잔뜩 들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았다. 의사는 신선이식을 꺼려했다. 난자채취 과정에서 너무 난소가 부어서 나중에 임신이 되었을 경우 복수가 찰 수도 있는 위험 때문이었다. 나는 그래도 좋으니 하겠다고 했고 의사는 안된다고 했지만 내가 이겼다. 이긴 줄 알았다. 약 10일 뒤 나온 신선이식 결과는 실패. 의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 달 쉬고 다시 오라고 했다.


 녹음이 눈부신 초여름이었다.

친구가 나한테 물었다. 그렇게라도 아이를 가져야 해? 나는 왜인지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는 그 말이 제일 정확한 내 마음이었다.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내가 특별히 유별날 것도 없는 상황 같았다.


그렇게 여름의 초입에서 나는 다음 시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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