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고, 상처주는 모습 작품화한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전시, 8월
미국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평단의 호평을 끌어낸 김희정 작가가 마침내 한국 미술관의 문을 두드렸다. 1963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과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학업을 마친 후 뉴욕, 보스턴 등지에서 수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다.
김희정 작가가 한국에서 개최하는 첫 개인전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Transmuted Existence)>은 경기도 광주에 있는 영은미술관에서 8월 4일까지 관람할 수 있다.
작가가 선보이는 아티스트 북(artist book) 장르에 매료돼, 작품 설치일(6월 19일)과 전시회 오프닝 행사일(6월 29일)에 영은미술관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작가의 철학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장시간에 걸쳐 진행한 인터뷰 기사를 2회로 나누어 게재하고자 한다.
- 작가님의 2006년 작품 <Eyes>를 시작으로 2009년 작품 <Come and Go>, 2010년 작품 <Growing Desire>, 2013년 작품 <Pebbles>, 2011년 작품 <Life As A Fragile Journey> 등 다양한 작품에 (사람처럼) 눈이 붙어 있습니다. 눈이 작품의 전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걸 보니 눈이라는 형상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눈은 작가님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뉴저지 버켄 카운티에 있는 주택가로 이사를 했을 때예요. 아파트에 줄곧 살다가 마당 있는 주택에서 살게 됐는데 뒷마당에 다양한 식물이 있었어요. 큰 나무도 있었고요. 주택 생활을 하면서 마당을 관리하다 보니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벌레가 아니라 식물의 생명력이 무서웠어요. 햇빛이나 영양분을 조금이라도 더 얻겠다고 아우성을 치며 뻗어나가는 모습이 무서울 정도였죠.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무를 자르고 식물도 뽑아버려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만약 식물에도 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 작품에 귀나 코 같은 다른 신체 기관을 붙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눈에는 굉장한 상징성이 있어요. 생명력을 부여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눈입니다. 식물에도 눈이 있다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르거나 뽑지 않을 겁니다."
- 그렇게 말씀하시니 고기를 먹을 때와는 달리, 어떤 죄책감도 없이 당연하게 식물을 먹으면서 살았던 날들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예 먹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굉장한 딜레마처럼 느껴지는데, 어떤 태도로 접근해야 할까요?
"저도 다 먹습니다. 고기도 먹고, 식물도 먹고, 과일도 먹죠. 다만 모든 존재가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하죠. 우리가 맛있게 먹는 과일도 칼로 껍질이 벗겨지고 과육이 도려내지는 순간 아픔을 느낄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식량이 되어주는 모든 생물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그렇지 않아도,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불교적인 색채를 느꼈습니다. 식물의 생명력에 관해 이야기하시는 걸 듣다 보니 작가님의 철학에 대한 궁금증이 커집니다. 작가님의 철학이 잘 반영된 작품 하나만 소개해주세요.
"그럼, 눈을 붙여 놓은 작품 중 <Come and Go>에 대해서 조금 얘기해 볼게요. 먼저, <Come and Go>는 기부받은 신발을 천으로 감싸서 꿰맨 다음 눈을 붙여서 벽에 설치한 작품이에요. 갤러리 벽면에 전시된 신발들은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타내요. 신발에 눈을 붙여 놓는 것만으로도 신발이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연상되잖아요. 신발을 천으로 꿰맴으로써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도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에는 제가 불교 미술을 공부하면서 얻은 깨달음도 반영돼 있어요. 불교 교리에 의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위에는 천상계가 있고, 그 아래에는 지옥이 있어요. 전시관 벽면에 붙어 있는 신발들은 지구상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자세히 보면 제일 아래쪽에 반쯤 잘린 신발도 있어요. 아래에서 올라온 신발들이 위를 향하는 거죠. 이 신발들을 통해, 다른 세상에 살던 존재가 지구상에서 현생을 살다가,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그리는 눈에는 또 한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냥 눈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구름이 보일 겁니다. 제가 그리는 이미지에는 모두 어떤 상징이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 구름은 사랑을 상징합니다."
- 작가님 작품에 눈도 자주 등장하지만 혀와 소문을 주제로 하는 아티스트 북 작품도 여러 개 선보이셨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모두 사람이 하는 말에 감춰진 날카로운 힘이나 상처를 표현하신 것처럼 보여요. 입놀림을 조심하라는 경고 같달까요? 말에 대한 작가님의 철학이 담겨 있는 걸까요?
"<Gossip>이라는 작품은 누군가의 말 때문에 상처받은 후에 만든 작품이에요. 사람들의 말이 비수가 돼 저를 찌르는 기분이었고, 그런 기분을 작품으로 표현한 겁니다.
아티스트 북 표지는 색동으로 씌우고 안에는 핀을 잔뜩 꽂았습니다. 그 핀을 만진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아요. 하지만 찔린 사람은 너무 아프죠.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상처를 주는지 상징적으로 표현한 거죠."
"<Tongues>는 제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지인에게 실수로 안 좋은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이미 말은 입 밖으로 나왔는데 상대방은 그 말 때문에 너무 상처받았죠.
그래서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못처럼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낼 수 있다는 의미로 이렇게 혀에 못을 꽂아뒀어요. 혀를 감싸는 나무 상자는 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문을 열었다고 표현하잖아요. 말문을 열고 혓바닥에서 쏟아져 나온 말이 누군가에게 비수가 돼서 꽂히는 모습을 묘사한 겁니다."
- 방금 설명하신 작품들은 다 아티스트 북 작품들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책을 번역하는 일을 하다 보니 작가님이 선보이시는 책 작품들에 관심이 많이 갔습니다. 무척 매력적이지만 아티스트 북이라는 장르 자체가 익숙하지는 않아요. 저처럼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아티스트 북이 무엇인지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평면 작업, 입체 작업, 설치 작업 등 다양한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중에서 저의 핵심 장르가 바로 아티스트 북입니다. 아티스트 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작가가 직접 한땀 한땀 손수 만드는 수제 책을 아티스트 북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책은 25권 정도 제작되죠. 두 번째로는 영어로 'rare book'(희귀하고 진귀한 책), 혹은 'one-of-a-kind book'(특별하고 특이한 책)이라고 부르는 단 하나밖에 없는 그런 아티스트 북이 있습니다. 제가 만드는 책은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제가 처음 아티스트 북 작업을 시작한 건 1991년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티스트 북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장르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60~70년 동안 아티스트 북의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 아티스트 북의 형태도 다양합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책처럼 보이는 작품도 있고 일반적인 형태의 책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작품도 있어요. 작가님은 어떤 형태의 아티스트 북을 주로 만드시나요?
"초기 작품들은 주로 커버가 있는 전형적인 형태의 책 모양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입체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됐고, 'wrapped sculpture'나 'box' 형태의 책 등 다양한 아티스트 북을 만들게 됐습니다."
-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아티스트 북 작품 중 몇 가지만 소개해 주세요.
"그럼, <Graveyard Offering I>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책 안쪽에 못이 삐죽삐죽 꽂혀 있습니다. 찔리면서 상처받고 고통받는 우리의 삶을 상징하죠. 중간에 놓여 있는 하얀 조각들은 나뭇가지를 천으로 감싸 꿰맨 거예요.
제가 40대였을 때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열심히 살았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힘들어했던 저의 40대, 중년의 위기를 상징하는 작품입니다. 그런데, 또 유심히 보면 뼈가 2개씩 묶여 있어요. 치료하려 한다고 단번에 치유가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치료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구현한 겁니다.
<Virtues for Success>라는 작품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국말로 표현하면 <성공의 덕목>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이 작품은 얼핏 보면 겉이 마치 금관처럼 화려하게 반짝입니다. 하지만 그 속은 시커멓죠. 검은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지', '저주', '욕심' 같은 나쁜 말이 적혀 있어요. 아무리 번쩍이는 것들로 겉을 치장해도 더러운 마음이 자라는 건 숨길 수 없다는 걸 표현한 겁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기사(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43310)를 옮겨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