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라는 속담이 있다. 지난 6월 국제도서전 독립출판 코너에서 만난 임희선 작가만큼 이 속담과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 임 작가는 미술을 공부하러 떠난 베를린에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세게 넘어졌다.
극도의 피로감 때문에 찾은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골수 검사를 권유받은 임 작가는 검사와 치료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모든 희망이 증발해 버린 듯한 우울감에 사로잡힌 임 작가는 잠깐 멈춰 서서 쉬는 쪽을 택했다.
부모님이 선택한 귀농지였던 괴산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쉬던 임 작가는 희망의 싹을 발견했다. 괴산에서 독립출판사 쿠쿠루쿠쿠(cucurrucucu)를 운영하며 일상의 순간을 글과 이미지로 기록하는 임 작가를 7월 30일, 괴산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학교 운동장 아이들 보며서 치유
모래섬 D-469. 가상의 모래섬을 주제로 하는 작품
- 국제도서전 독립출판 코너에서 작가님을 처음 뵀습니다. 그곳에서 봤던 많은 책 중 모래섬 D-469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먼저 간략하게 책 소개 부탁드릴게요.
"D-469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모래섬입니다. 제가 앓고 있는 질병의 분류 코드죠. 2017년에 진단을 받았는데요. 처음에는 우울감에 사로잡혀서 밖에도 나가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어요. 방에 틀어박힌 채 창밖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을 내다봤는데, 그 운동장이 모래로 만들어진 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중 어린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방을 축 늘어뜨린 채 걸어가는 아이도 있었고, 공을 갖고 노는 아이나 활기차게 하교하는 아이도 있었어요. 같은 공간을 오가는 다양한 아이들을 관찰하다 보니 제 감정이 조금씩 변했습니다. 그때 찍은 운동장 사진과 병원에서 받은 각종 서류를 정리해서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 질병코드 D-469를 검색해 보니 골수형성이상증후군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건강 상태는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완치 방법은 골수 이식뿐이지만, 지금 제 상태가 골수 이식이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닙니다. 계속 병원에 다니면서 추적 관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처음 진단받았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모래섬 D-469의 한 페이지
- 투병을 주제로 하는 일반적인 글과는 느낌이 매우 다릅니다.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객관적인 내용이 담긴 서류와 기호를 활용한 이유가 있나요?
"맨 처음 책을 기획할 때는 일기나 그 당시에 썼던 글을 활용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읽어보니 너무 감상적이더라고요.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호소하기보다는 내가 가진 병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진료 기록서라든가 처방전 같은 서류를 운동장 사진과 대비시키면 독자들이 좀 더 재미있어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7월 30일 괴산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임희선 작가
- 모래섬 D-469에는 "사람들은 무거운 눈물을 바다라고 불렀다. 모래섬에 가려면 반드시 이 바다를 건너야 했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작가님은 무거운 눈물의 바다를 다 건너셨나요? 아니면, 아직 건너는 중이신가요? 만약, 다 건너셨다면 눈물의 바다를 건너는 데 어떤 방법이 도움이 됐나요?
"지금은 다 건넜다고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물론 언제 또 그 바다에 빠질지는 모릅니다. 사실 계속 모래섬에 있을 수만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언젠가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질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면에서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겁니다.
처음 진단을 받고 무척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이 병을 극복하고 이겨내야겠다는 생각은 큰 도움이 안 됐습니다. 오히려, 이 병과 평생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니까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 글과 사진, 그림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시는데요, 그중에서 어떤 걸 가장 좋아하시나요?
"유치원 때부터 그림책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그림을 그리고 창작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대학을 정할 때 용기가 안 났어요. 그래서 차선으로 광고를 택했습니다. 졸업 후 영화 마케터로 2년쯤 일하다 보니 '이 일을 계속하면 10년 뒤에 내가 행복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더 늦기 전에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을 해보기로 마음먹고 퇴사했죠. 연남동에 있는 그림책 아카데미에서 2년간 공부를 하다 보니 순수 미술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베를린에 그림을 공부하러 갔습니다."
- 서울, 베를린, 괴산은 작가님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입니다. 각 지역이 작가님께 어떤 의미가 있나요?
"서울은 제가 선택한 곳은 아니고, 주어진 장소였습니다. 태어나 보니 서울이었죠. 베를린은 꿈을 이루고 싶어서 선택한 곳이었어요. 유학 생활 중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가 골수 검사를 권유받았어요. 혼자서 그런 일을 감당하기에는 무서워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는 인생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베를린 하면 실패가 떠오릅니다."
- 베를린 병원에서 문제를 잘 찾아낸 덕에 치료도 받고 책도 만들게 됐으니 베를린을 치유와 행복의 출발점으로 여기면 어떨까요?
"맞아요. 괴산에 오고 나니 또 그렇게 느껴집니다. 제가 베를린에서 돌아올 무렵, 한국에 계시던 부모님은 괴산으로 귀촌할 계획을 세우고 계셨어요. 처음에는 선뜻 따라가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았어요. 시골 생활이 엄두가 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돌봄이 필요한 상태였던 터라 혼자 서울에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1년만 살아보기로 마음먹었어요. 괴산을 생각하면,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저한테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나중에 괴산을 떠난다면 이곳 사람들이 많이 생각날 거 같아요. 여기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결혼도 했습니다."
괴산 일기. 임희선 작가가 괴산에서 살면서 만난 다양한 장면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책.
- 남편분을 괴산에서 만나셨어요?
"남편도 도시에서 살다가 귀농한 사람입니다. 행정안전부에서 진행하는 '청년마을 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 남편을 만났습니다. 괴산에서 좀 더 행복하게 살 방법을 찾기 위해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요. 뜻밖에도 그곳에서 인연을 찾고 결혼까지 하게 됐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처럼
- 괴산에서는 책 만들기 외에 또 어떤 일을 하시나요?
"먼저, 괴산 청년들과 '청년협동조합 오롯'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여러 가지 창작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축제도 기획하고, 영화나 노래, 등산, 제빵 등을 주제로 하는 소모임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연령대가 참여하는 영화 모임도 3년째 운영 중입니다. 학생들을 위한 영화감상 동아리, 그림책 동아리, 소설책 동아리도 운영합니다."
목도 시장 활성화를 위한 '목도 나들이' 행사 후 한자리에 모인 '청년협동조합 오롯' 관계자들
- 독립출판사를 운영하시면서 직접 책을 출판하시는데요. 어떤 계기로 독립출판을 시작하셨나요?
"처음 괴산에 내려와서는 한 달간 그냥 쉬었어요. 쉬면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니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몸이 아파서 회사에 다닐 수는 없었고,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도 책을 만들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어요. 괴산에서 쉬다 보니 문득 용기가 나서 출판사를 시작했습니다."
- 독립출판의 장단점이 궁금합니다.
"독립출판을 하면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합니다. 원래 혼자 일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혼자 모든 걸 결정하고 책임지는 게 어떨 때는 부담이 됩니다. 그래도 단점보다 장점이 큽니다. 책을 만들면서 조금씩 저만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느낌이 정말 좋습니다."
- 출판사 이름이 쿠쿠루쿠쿠(cucurrucucu)인데요. 처음 들어보는 단어인데 어감이 재미있어요. 무슨 뜻인가요?
"출판사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나서 어떤 이름이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쿠쿠루쿠쿠 팔로마'라는 멕시코 노래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쿠쿠루쿠쿠는 비둘기가 '구구' 우는 소리를 뜻하는 건데요, 그 발음이 너무 귀여웠어요. 또, 비둘기는 사람들한테 소식을 전하잖아요. 제가 관찰한 이야기를 비둘기처럼 잘 전달하고 싶다는 뜻을 담은 이름입니다."
- 현재 기획 중인 책이 있으시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올 초에 할아버지가 동네 분들 드리라며 넥타이를 50개쯤 주셨어요. 넥타이의 다양한 패턴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를 담은 책을 쓰고 있습니다. 11월에 출간할 계획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