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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Oct 12. 2021

욕망의 용수철

연휴 동안 구매한 물건들과 장바구니에 아직 담겨 있는 물건들

물건을 잘 못 버리는 편이다. 최근엔 그나마 과감하게 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 버리고 비우는 친구들을 보면 나는 여전히 많은 걸 짊어지고 사는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당근마켓을 깐 후에도 별로 쓸 일이 없었다. 지워버렸다가, 안 쓰는 가방을 팔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깔았다. 안 쓰는 가방을 팔아볼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은 새로운 가방을 사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막상 팔려고 꺼내놓고 보니 여전히 이쁜데 그냥 갖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당근에 가방 3개를 올려놨는데 삼일째 되도록 아무도 연락이 없다. 안 팔리면 다시 옷장에서 잠들어 있겠지.


옷이 많은 편이다. 사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버리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웬만한 종류의 옷은 다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1년 8개월째 하고 있어서 최근 2년간 한 번도 입지 못한 옷이, 한 번이라도 입은 옷보다 더 많다. 가끔 옷장을 열어 안 입는 옷을 정리할까 하고 살펴보지만 여전히 내 눈엔 다 이쁘고, 언젠가는 입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옷은 충분하다. 더는 사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고 한동안 옷 쇼핑을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이상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옷 외의 다른 것이 자꾸 사고 싶다. 최근에 장바구니에 담은 것들은 주로 목걸이, 반지, 귀걸이 같은 액세서리류. 몸은 하나인데 반해 손가락은 열 개니까 반지는 자꾸자꾸 사고 싶고. 목도 하나지만 목걸이도 사고 싶다. 하지만 참고 있다. 이미 있고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갖고 싶은 것은 가격이 좀 있어서 아직은 잘 참고 있는 중이다.


마음에 들어서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사지 않은 액세서리, 가방, 신발 등이 쌓이는 와중에 최근에 망설임 없이 결제한 게 3개 있다. 책상 스탠드와 히터와 와인랙. 필수품이 아닌 것을 사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필요한 물건을 보면 오히려 더 쉽게 구매 결심을 굳히고 본격적으로 온라인 쇼핑을 시작하게 된다. 필요로 하는 것은 쉽다. 필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최근 인천에 당일치기 여행을 가서 일광전기에서 운영하는 라이트하우스라는 카페에 들렀다가 예쁜 전구와 스탠드들을 잔뜩 보고 왔다. 인천에서 전구나 스탠드를 사서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더욱 더, 무척, 꽤, 상당히 그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해가 길었던 여름은 그럭저럭 지나갔는데, 해가 짧아지면서 오후 늦은 시각 회의를 하다가 방에 불을 켜러 잠시 일어나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화상채팅 프로그램에 화장을 하지 않아도 표시가 나지 않도록 필터를 설정해놨는데 자연광이 사라지면 화질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가짜 눈썹이 동동 떠다니는 부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가짜 입술은 표시가 덜 난다). 이럴 때, 책상에 앉아 간단하게 스탠드 조명을 켜면 좋겠다,라고 생각은 했으나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고, 디자인보다는 실용성에 주목해 스탠드 조명을 하나 골랐다. 결심과 결제는 각각 10초면 충분하다.


두 번째 쇼핑 결과물은 히터. 지금 집에 이사 온 후 첫겨울에 나는 도시가스 요금 폭탄을 맞았다. 재택근무 때문에 거의 온종일 집에 있기도 하고, 고양이들도 있기 때문에 보일러를 항상 24도 정도로 맞춰놓고 겨울을 났는데, 추워지기 시작하자 도시가스 요금이 첫 달에 20만 원, 그다음 달엔 25만 원 정도가 나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설정온도도 1도 낮추고, 밸브도 몇 개 잠갔는데 그다음 달엔 28만 원이 넘게 나와버렸다. 그런데도 왜인지 난방기구를 따로 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첫겨울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다시 날이 쌀쌀해지자 히터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겨울엔 커튼도 잘 치지 않았는데 올 겨울엔 커튼도 열심히 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러면 우리 집 고양이들이 바깥구경을 못할 테니 안 되겠네 생각했다가, 낮에는 열어주고 밤에만 닫는 쪽으로 결정했다. 처음에는 레트로 느낌의 곤로 같은 걸 떠올리며 검색을 시작했는데, 노르웨이 제품에 한눈에 사로잡혔다. 깔끔한 화이트 컬러에 슬림한 디자인에 끌려 일단 그 상품으로 정하고 가격비교를 한 후, 결제했다. 이건 필요한 거니까! 너무 잘 산 거 같아! 왜 진작 생각을 못했지! 하며 가뿐한 마음으로.


세 번째 구매품인 와인 랙은, 사실 필수품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없는 물건이기는 하다. 한 병을 따면 며칠씩 두고 먹으니까 필요해,라고 미리 생각한 건 아니고 이것저것 보다가 우연히 디자인이 예쁜 와인랙을 발견했다. 헤라클레스가 와인병을 받치는 느낌의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처음 본 링크에는 가격대가 좀 있어서 그냥 구경만 해야지 했는데 스크롤을 하다 보니 처음 본 것의 1/3 가격이면 살 수 있는 판매처가 나왔다. 가장 낮은 가격대가 어느 정도로 형성돼있는지 확인하고 조금 더 검색을 해서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해외배송으로 결제를 완료했다.


저렴하게 잘 샀다, 고 스스로 뿌듯해하다가 어쩌면 비싼 가격으로 올려둔 사업자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올려둔 사업자가 같은 사람은 아닐까, 고도의 상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어쨌거나 싸게 잘 샀고, 필요한 물건이고, 그래 됐다 잘 샀어!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


이밖에, 아직 사진 않았지만 곧 살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나를 사로잡았거나 사실 필요한 줄 몰랐는데 알고 보면 필요한(?) 물건들도 몇 있다. 하나는 코닥에서 나온 너무 귀여운 즉석카메라 겸 프린터고, 또 하나는 사진 액자.


즉석카메라/프린터는 여행 가서, 고향 가서 엄마랑 조카들 만날 때 유용하게 쓸 것 같다고 사용처를 만들었지만 사실 너무 예뻐서 갖고 싶고, 사진 액자는 고양이들이 습식 사료 먹을 때 흰 벽에 너무 많이 튀어서 그 앞에 예쁜 액자를 하나 세워두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시작이다. 아직 결제는 하지 않았다.


심리학을 공부했거나 관련 미드를 많이 본 사람들은 대번에 지금 나의 소비욕과 나의 정신상태를 쉽게 설명하겠지. 나도 나를 진단할 수 있을 것 같다. 욕망의 용수철을 힘껏 누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 욕망의 용수철은 하나가 아니었고, 나도 나를 모르겠다, 라기보다는 알지만 참고 싶지 않아! 참아서 무엇하리, 그렇다고 다 사 젖히면 그건 또 어떡하리. 아몰랑!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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