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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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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호 Dec 15. 20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나지 않는 밤은 없다.

"그러니까, 언젠가 깨어나리란 것을 믿고, 지금은 푹 주무세요."

               




애도와 우울, 마지막 이야기



5 Stages of Grief


퀴블러-로스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음을 자각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5단계'에 대해서 설명했을 때 '애도'의 작가이자 취리히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베레나 카스트는 이 단계를 사랑하는 대상을 떠나보낸 사람들의 애도 과정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애도의 5단계

1단계: 지각하지 않으려 함(부정)
2단계: 분노
3단계: 타협
4단계: 우울
5단계: 수용



상실을 직면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현실을 부정한다. 커다란 충격에 휩싸인 사람들은 좀처럼 상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정하는 순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자신을 덮쳐올 거라는, 본능적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저 "말도 안 돼!" "사실이 아닐 거야" "믿을 수  없어"라는 말을 반복하며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이 단계에서는 무감각 상태에 빠지기 쉬운데, 이는 정신을 보호하는 장치가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일부러 감각을 무디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분노, 불안, 고통 등 다양한 감정이 뒤범벅되어 나타난다. 이제 그이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 그이의 아름다운 미소도, 마음을 달래 주는 편안한 목소리도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프도록 생생하게 다가와 까무러치게 고통스럽다가도, 불쑥 화가 치솟는다. 인간은 이리도 덧없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였나, 나는 그의 죽음 앞에 왜 이리 속수무책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가! 노여움은 스스로를 향했다가, 나만 두고 덜컥 떠나버린 이를 향했다가, 방향을 돌려 의사나 병원에 분노를 전가하기도 한다. "그 사람 살려내라"며 마치 그의 죽음이 의사의 탓인 양 절규하는 애도자는, 그의 죽음과 나의 불행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단죄하는 것으로 이 '미칠 것 같은' 고통을 경감시키려고 한다. 내가 지목한 그가 진실로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애도자는 그저 나의 고통을 떠넘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서서히 상실을 직면하게 되면서, 커다란 슬픔의 파도가 밀려드는데, 여기에는 후회와 자책의 감정이 가득하다. '좀 더 잘해줄 걸', 하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그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더 잘 할 텐데' 하고 일어날 수 없는 일과 협상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이제 '왜?'로 가득했던 마음 안에 '어떻게?'라는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사람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다시금 의혹과 우울과 무감동이 나타나기 쉽고, 애도자는 삶이 도무지 전과 같지 않고,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며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애도 과정을 어느 정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조금씩 상실이 수용된다. 처음에는 상실 대상을 잊지 못한 채로 고통을 견디며 상실을 수용하지만, 차차 상실 대상과 관련된 삶의 형태나 기억들이 잊히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삶이 들어서게 된다. 이때 애도자는 자신이 죽은 자와 함께 죽었음을, 이제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함을 깨닫는다.


애도의 5단계가 통설처럼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꼭 이와 같은 순서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단계가 함께 나타날 수도 있고, 특정 단계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애도자의 특성에 따라, 애도의 방식도 달라지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요시모토 바나나 작가의 암리타를 읽었다. 일본 소설을 즐겨보지 않는 편인데도,  그때는 유난히 일본 특유의 서정이 그리워져서 검색까지 해가며 찾아보았던 기억이 난다. 읽으면서 참 아름답다고 느꼈고, 다 읽고 나서는 기억 저편에 묻어버렸다. 일본 소설은 꼭 그렇다. 볼 때는 좋은데, 보고 나면 기억나는 부분이 없다. 그게 일본 소설을 자주 읽지 않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여하튼, 딱히 기억나는 장면이나 대사가 없는데도 암리타를 읽으면서 느꼈던 분위기와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가끔 일상에서 불쑥불쑥 떠올라서 문득 그 소설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그것이 작가의 능력이리라.  


요시모토 바나나는 죽음과 상실, 치유에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때로는 굳이 이런 자극적인 소재를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을까(예를 들자면, 불륜 같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개인적 감상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는 확실히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요시모토 바나나는 이런 말을 했다.


"문학적으로 보면 절망과 같은 문제는 가둬버리는 것이 더 평가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을 치유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문학적으로 위대한 작품이 아니더라도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작품을 쓰려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변하지 않고, 항상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써왔다. 상실 속에서 허우적대는 주인공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녀는 영혼이나 꿈이나 초능력 같은 오컬트적인 요소까지 기꺼이 동원한다. 언뜻 보면 허무맹랑하게 여겨지는 구원 방식이지만,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굉장히 강조했으니까.



하얀 강, 밤배




『하얀 강, 밤배』 역시 그녀의 작품답게 상실과 치유의 과정을 그려냈다. 작품에 실린 세 편의 단편은 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는 세 명의 젊은 여성을 각각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작가 특유의 차분하고 일상적인 문체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그들의 절망이 확실히 피부로 와 닿지는 않지만, 그들은 지금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서있다. 작은 배에만 몸을 의지한 채, 하얀 달빛이 비치는 넓은 강 한 가운데에 홀로 떠있다. 그들에게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 뭍에 닿느냐 아니면 가라앉느냐.


그들은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상태가 이상하고, 어딘가 지치고 무기력하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것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표제작 「하얀 강, 밤배」의 테라코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루 종일 잠에 취해있다. 잠이 인생을 완전히 침식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이다. 「밤과 밤의 나그네」에서 마리에는 밤마다 몽유병 환자처럼 돌아다니고, 「어떤 체험」에서의 후미는 매일같이 술을 마신다. 그들은  '바깥세상에 대한 모든 반응을 정지시키고, 쉬고 있다. 인생이 오직 괴롭기만 해서'. 분명 가슴에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공동이 있는 데도 애써 외면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계속 살아간다. 되돌아보기에는 너무 아프고, 인정하기에는 참으로 두렵기 때문이리라. 소중한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들이 이렇게 눈물이 메마른 것처럼 무감각하게 살더라도, 어느 누구도 그녀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애도자가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슬픔이 너무 격해서이다. 그러나 상실을 직면하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로 이 단계에서 멈추어 버리면, 그들은 차가운 강바닥으로 가라앉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소중한 것의 상실로 상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으레 이런 말을 건넨다. "괜찮아,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관련된 유명한 구절도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나 이것은, 틀렸다.


상실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잊히는 것이 아니라 애도라는 힘든 노동을 통해서 잊히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죽음과 같은 밤의 끝에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을 포기해버리려고 할 위기에 작가는 그들을 구원해낸다. 끔찍한 상실에서 벗어날 실마리로 작가는 꿈이나 영혼 같은 비현실적인 요소를 도입하지만 이것은 그저 하나의 계기일 뿐, 상처를 직면하고 극복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그렇게 그들은 길었던 동면에서 깨어나 다시 뭍으로 올라갈 준비를 한다.


 “내 안에서도 알게 모르게 활기찬 기분이 되살아난 듯하다. 그것이 친구를 잃고, 일상에 지친 내 마음이 체험한 자잘한 파도, 조그만 소생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역시 사람은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잊었지만, 혼자서 자신 안의 어둠과 마주했더니, 깊은 곳에서 너덜너덜하도록 상처 입고 지쳐버렸더니, 불현듯 강함이 고개를 쳐든 것이다.”     


보통, 상실을 극복하려면 '울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 속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그것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눈물은 사람을 회복시킨다는데 정말일까?" 하고.


그리고 다른 인물을 통해 이렇게 대안을 제시한다. "후련하고 재미있는 일은, 뭐든 해보는 게 좋지. 후련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사람마다 애도하는 방식은 다르다. 롤랑 바르트처럼 애도 일기를 쓸 수도 있고, 어딘가로 훌쩍 여행을 떠날 수도 있고, 이제까지처럼 일상을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 방식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상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애도하는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상실의 대상에게서 분리되어 다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아아,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소름 끼치도록 투명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정말, 아름다웠다.
밤을 지새우는 많은 사람들도, 상가에 줄줄이 켜진 초롱의 불빛도,
서늘한 바람 속에 서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이마 선도.   

그런 생각을 하자, 모든 것이 너무도 완벽해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돌아보는 풍경 속,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아아, 지금 여기서 눈뜨기를 정말 잘했다.


물론

애도라는 것,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삶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저 의미 없이 앞으로만 나아갈 뿐인 밤 속"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애도하라는 말은 어쭙잖은 훈계나 잔소리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이와 공동으로 구축했던, 행복한 세계는 그의 상실로 무너진 지 오래다. 무너진 세계 너머는 끝없는 어둠뿐이며, 그 어둠마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연약하고, 무의미하다. 그런 당신의 슬픔을, 설령 내가 상실을 겪었다 해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일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마디만은 꼭 하고 싶다. 끝나지 않는 밤은 없다. 슬픔의 밤을 끝내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는 애도해야 한다.


무너진 세계의 잔해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당신에게, 오늘은 편안한 잠이 내리기를.






*참고문헌:

Kast, Verena, "애도", 2007., 궁리

채정호, "이별한다는 것에 대하여", 2013., 생각속의집

요시모토 바나나, "하얀 강 밤배", 2005.,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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