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팅페이스 Feb 10. 2022

뒤늦게영화리뷰2 #버닝

영화관을 나와서도 한참이나 입을 다물게 하는 영화가 있다. 내게 버닝이 그랬다. 질문이 수백만가지로 뻗는데, 어느 하나 뚜렷하게 답을 할 수 있는 건 없다. 내게 떠오른 질문들이 글로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보편성을 띄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자신이 없다. 버닝은 백 명이 본다면 백 명이 서로 다른 서사로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영화다.


그러니 이번 리뷰는 포기 선언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나의 생각을 당신에게 설득시키기를 포기한다. 다른 영화라면 개인적인 경험이 리뷰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조절하려고 애쓰겠지만, 이번엔 내 경험이 글에 얼마나 배든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버려둘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을 왜 읽어야 하냐 묻는다면, 진부하게도 다양한 생각을 접하는 것의 장점을 말하는 수밖에는 없겠다.


*스포 있음.


내게 버닝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이 대사다.


"너는 왜 아무 데서나 옷을 벗어? 그거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야."


이 말은 종수(유아인 역)가 해미(전종서 역)에게 했다. 해미가 종수와 벤(스티븐연 역)과 놀다 노을에 감동해 상의를 탈의하고는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 것을 두고 종수가 한 말이다. 이전까지 종수는 해미에게 있어 고양이를 부탁받을 정도로 신뢰받는 친구였다. 벤에 따르면, 해미는 종수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말했다.


종수가 문제의 말을 한 직후 해미는 사라진다. 해미를 좋아하는 종수는 해미를 찾기 위해 자취방과 직장, 고향집을 헤맨다. 그러나 해미의 직장 동료인 나레이터 걸은 여성 인권에 대한 연설을 나무라듯 늘어놓을 뿐이다. 해미의 어머니는 해미가 없어져도 딱히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말한다. 결국 종수가 향한 곳은 벤이다. 종수는 벤이 해미를 죽였을 거라고 의심하고 그를 좇는다.


이런 종수는 배우 유아인과 닮았다. 종수가 문제의 말을 하기 전에 해미는 종수에게 의지했다. 유아인의 페미니스트 선언 이전에 많은 여성들이 유아인을 지지했던 것처럼.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종수는 해미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의 불안을 먼저 봤다. 해미의 나체를 벤이 보고 있다는 불안과 그에 대한 질투심. 유아인이 결정적인 순간에 소위 '성대결'이라는 싸움 이면에 있는 성차별적 구조를 보기보다는 자신이 겪고 있는 위기를 본 것처럼.


나는 한편으로 이런 종수의 행동과 생각이 타인의 불행을 대하는 한국 사회와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불행에 자신이 던졌을 지도 모르는 불씨를 생각하기보다 자기보다 훨씬 더 나빠보이는 사람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 말이다. 영화가 종수의 시선을 따르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해미가 죽었다고 믿지만, 다른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해미 스스로 종수를 떠났다는 해석 말이다.


물론 해미의 실종은 누구 한 명이 만든 게 아니다. 해미의 카드빚을 나무라는 어머니(젊은이의 경제적 사정을 쉽게 재단하는 어른층을 상징한다)와 나레이터 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 종수의 말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해미의 고독을 만들었다. 해미는 "버려진 비닐하우스"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종수는 자신이 내뱉은 "창녀나 하는 짓"이라는 말을 후회할 법도 하지만, 그런 모습은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다. 종수는 벤의 집에서 해미의 액세서리를 발견하고는 벤의 혐의를 확신할 뿐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수수께끼가 풀린듯이 소설을 써내려 간다. 이전에 종수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서"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진실을 확증하는 근거가 어느 하나 등장하지 않는데 종수는 해미의 실종을 야기한 범인이라고 생각한 벤을 태워버린다. 세상은 미스터리로 가득한데, 종수는 이 불확실성을 견디기 보다는 미완성 서사를 만들고(소설을 쓰고) 가장 나쁜 놈을 태운다. 방화는 모든 것을 흔적도 없이 없애버리기 때문에 진실은 더 요원해져 버린다. 용산 참사가 화재로 진실이 더 모호해진 것처럼.(영화에는 용산 참사를 그린 그림도 등장한다) 이게 이창동이 본 젊은이의 모습일까?


이창동 감독은 보통의 젊은이는 "종수와 벤 사이 어디쯤일 것"이라고 말했다. 희망 없는 불확실성 속에 살면서 벤에게 수수께끼와 질투심을 느끼는 종수와 돈이 많지만 존재론적 위기를 겪고 있는 벤. 그러니 해미보다 벤의 시선이, 벤보다 종수의 시선이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건 당연하다.


내가 가장 아쉬움을 느끼는 지점이 여기다. 왜 '보통의 젊은이'는 종수와 벤의 스펙트럼 위에 있단 말인가. 해미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해미는 종수와 벤과는 완전히 다르다. 허무하고 차별받는 삶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와 자유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게 남들 눈엔 이상하고 신비하게 보이겠지만 해미에게는 그게 진실된 삶이다.













작가의 이전글 뒤늦게영화리뷰 #1 샤이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