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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희 Mar 24. 2016

#10. 못 들어주는 부탁의 미안함,이렇게라도 덜어요

'부탁쿠폰'을 발행해 보세요.


지난 2월 방영됐던 무한도전의 못친소 특집 2-.


장장 열 다섯 시간동안 이어진 길고 긴 녹화의 끝 부분에서 개그맨 김수용 씨가 녹화 말미에 불쑥 사회자에게 이런 부탁을 했죠. 맥락은 이렇습니다.


(한 사람씩 출연 소감을 물으며)
유재석 : 김수용씨는 오늘 어떠셨는지?
지석진 : 수용 씨는 이제야 좀 힘이 나나 봐요.
유재석 : 아유 오프닝에 그렇게 좀 해 주시죠!
김수용 : 이제 발동 걸렸네요. 그럼 저 다음 주 목요일(무도 녹화일)에 나와도 돼요?
유재석 : (단칼에)아니요. 다음 주 목요일은 조금 힘들구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넘어가는 엠씨 유의 말에 흠칫 놀랐습니다만, 이내 웃었습니다.

예능이니까요.

'웃음'이 최고이자 유일한 목적인 예능 프로그램이니까요.

예능 프로그램에서 누가 어떤 제안을 거절할 때엔 단칼에 자를수록 매력 넘치는(?) 화면이 나옵니다. 무참히 무안함을 당한 쪽의 반응, 이어서 질세라 반격에 나서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거든요.


하지만 실상에서는요? 서로 농담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제안이나 부탁을 저렇게도 단칼에 거절하기는 무척 힘이 듭니다. 아무리 가볍더라도요.


불가능한 상황을 보며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저는 그 어떤 예능도 리얼이 아닌, 드라마나 영화 못지 않은 판타지라 생각합니다.
어찌 살면서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거침 없이 대머리라며 무안을 주고(무한도전 무한상사 편 등등),

상사라고 해서 부하직원에게 대놓고 욕설과 갑질을 일삼으며(미국의 유명 코미디언이자 토크쇼 진행자 코난 오브라이언의 영상을 즐겨 보는데요, 게중엔 쇼 진행자이자 오너인 그가 스탭에게 심한 장난을 치는가 하면 "오늘은 누가 저성과자인지 찾아내서 해고해야겠어요."를 주제로 하는 장면 등이 여과 없이 나옵니다. '상사로서  나는 너희에게 이럴 권리가 충분해'란 느낌이 배어나오죠.
  고소함이 일품인 갈치구이를 쩝쩝 맛있게 먹다가 목에 콱 가시가 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요. 넋놓고 웃으며 보다가도 눈엣가시처럼 불편해지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니 말입니다.
아, 그래도 물론 전 그의 빅 팬입니다. 가시 쯤이야 발라먹음 되죠. 맛있으니까!),

처음 보는 상대에게 외모 지적을 저렇게도 심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요.(못친소를 못 보셨더라도 충분히 짐작 가능하시리라...)

이 모든 게 사실상 내가 사는 이곳 real world 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카타르시스와 함께 남녀노소 깔깔 웃게 되는 예능은 여러 모로 참 매력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요.



친구야, 이런 게 있어. (금융상품) 한 번 봐봐.
돈 좀 있니? 급해서 그러는데 조금만 빌려줄래?며칠만!
이번 주말에 별 일 없다 그랬죠? 그럼 나랑
근무, 좀 바꿔주지 않을래요?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한 번 만나보지 않을래?(그런데 상대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음)


마지막 소개팅은.. 글쎄, 너무 소심한 예인가요. 그래도 짐작건대 고민해 본 분들이 많으시리라 봅니다. 특히나 상사와 같은 어려운 상대가 제안할 때는 말입니다. 


글로 옮겨놓으니 그저 짧은 문장일 따름이나 건조하게 나열된 텍스트들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 끈끈한 저 행간의 분위기란!


모든 대화에는 둘 사이에 있었던 그간의 히스토리가 숨어 있습니다. 부탁의 종류도 배경이 되는 상황도 정말이지 다양하죠.


그래서 거절은 참 어렵습니다. 그와 다시는 보지 않을 사이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아니, 안 보는건 차라리 나중 문제죠. 누군가를 고의로 돕지 않은, 나쁜 혹은 매정한 사람이라는 악명(누명에 가깝죠. 누가 부탁받을 줄 알았습니까?)을  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떤 종류의 제안 혹은 부탁이든 거절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고픈 말씀은 '거절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다만 못 들어주는 데 대한 마음의 빚을 더는 방법이지요.


부탁을 들어주기 어렵다 판단될 때에는,


거절의 말을 한 직후에 붙여

 '부탁 쿠폰'을 발행해 보세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도움 쿠폰

: 이번엔 못 들어주지만 다음에 내가 형편이 좋아지면 다른 부탁 하나 들어줄게.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가도 좋습니다.)대신 이번엔 정말 미안하다.


미안함을 없애주는 길티 프리(guilty free) 쿠폰

: 대신 내가 너한테 이 거절쿠폰을 줄게. 다음에 내가 무슨 부탁을 했는데 네가 못 들어주겠다면, 지금의 나처럼 미안함 느끼지 말고 넌 부담없이 이걸 꺼내 쓰면 된다 친구.

(불현듯 노파심이... 혹시 쿠폰을 종이에 그리거나 인쇄해야 한다고 믿고 계신 건 아니죠?그렇담 놀랍도록 순수한 당신^^)


선물 쿠폰

: 어머님, 모처럼 먼저 전화주셨는데 주말에 선약때문에 못 찾아뵈어 죄송해요. 대신 다음에 갈 때 드시고 싶은 거 여쭤보면 꼭 말씀해 주셔야 돼요. 맛있는 걸로 사 갈게요!


이런 말을 듣는 상대방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이 사람, 내 제안을 진지하게 접수?했구나.

그리고 이 일로 나와의 관계에 미묘한 틀어짐이 생기는 걸 원치 않는구나.


여러분, 관계에서 미묘한 틀어짐의 순간을 경험하신 일이 있나요?

두 사람 간 관계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참기 힘든 어색한 순간, 그리고 딱

그 어색함만큼 생겨난 거리감.

관계의 결이 달라지는 순간. 

둘의 궤도가 '태양과 지구'였다가

'태양과 목성' 쯤으로 멀어진...


                 사람은 마치 하나의 행성같아요.

          출처. 네이버 bpzwxxko61님의 블로그


'아, 이제 우리 사이는 틀렸어. 아마 이전과 같기 어려울 거야.'

이런 느낌이 급습해 오는 순간 말입니다.


이 느낌으로부터 둘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의 역할을 쿠폰이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실상 제가 이전부터 일관되게 소개하고 있는, '내게 유리한 프레임으로의 전환'의 예이기도 합니다.

 

부탁을 거절당했다는 사실,

이 사실이 주는 언짢은 느낌으로부터 얼른 상대가 빠져나올 수 있도록, 거절 말미에 다른 화제를 슬쩍 넣어주는 것입니다.



대신 두 가지를 유의하십시오.


1. 다음에는 꼭 지킬 것을 염두에 두고 말의 수위를 조절하십시오. 다시 적으면, 지금 느끼는 미안함의 크기를 상대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리한 내용을 덧붙이시면 안됩니다. 그건 정말이지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미래의 당신 정신건강에 해롭고도 미안한 일입니다. 예컨대


주말 근무를 못 바꿔드려서 미안해요.
대신 다음 주쯤 점심 한 번 먹어요.
제가 살게요.

라고 해야지

이번엔 미안해요. 대신 다음 번에 (근무를) 두 번 바꿔드릴게요.

라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거죠.

그날 밤 이불킥과 함께 밀려오는 후회의 쓰나미를 예방하고 싶으시다면요.^^



2. 이 모든 얘기를 대답에 녹여 낼 시간이 필요하시다고요? 그렇다면 두말할 것 없이 다소간의 시간을 요청하세요.

부탁한 사람이 얼마나 편한 사이든,

혹은 부탁의 무게감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답변을 위한 타임 찬스는 부담없이 활용하셔도 좋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달라고 하세요.

난 그저 핑계를 만들 시간을 벌려는 걸까? 죄책감을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드럽게 표현하는 법을 찾는 것 또한 관계를 위한 노력이잖아요. 상대의 기대감을 절망으로 바꿀 만큼 너무 긴 시간이 아니라면요.



듀크 로빈슨 저, '내 인생을 힘들게 하는 좋은 사람 콤플렉스'


끝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오늘의 주제 관련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결코 다독자라고 볼 수 없는 저입니다만, 소개드리고픈 나름의 독서법은 있어요.
바로 목차를 훑어보고 입맛 당기는(?) 주제부터 펼쳐 보는 것!
그러다 흥미없는 부분을 끝까지 안 보게 되면 어쩌냐구요?
그런 게 걱정되신다면
앞에서부터 쭉 읽더라도 다 못 보신 책들을 떠올려보십시오.
(저 역시 다 못 읽은 책이 수두룩 뻑뻑합니다.) 뭐 어때요! 책이 충분히 흥미롭지 않으면 완독 못 할 수도 있는 겁니다. 책 탓임 내 탓 아님 ㅎㅎㅎ


이상, 거절이 어려워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맘에 안아본 적이 있는 분들께 드리는 글이었습니다.

-타인의 안녕과 평화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의 안녕과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일상에서 반드시 우선순위에 놓아야 하는 전제입니다.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이 정이 없는 냉혈한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요.



여기까집니다. 말로 나누는 커뮤니케이션은 때론 이렇게 참 어렵지만, 진정성을 갖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우리 계속 나아가도록 해요.


많이 웃는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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