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 기념, 대선 결과를 보고 써보는 나의 여성 연대기
생각해보면 나는 대학생이 되고나서 '여성'으로서의 내 정체성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이전까지는 여성이 많은 그룹에서 자라나서(세 자매, 여초 친척들, 여고 진학), '여성'이라는 정체성 말고 그냥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2차 성징을 겪으며 여성의 '몸'에 대해 알게되고, 남성 어른들의 여성 비하& 성희롱에 알 수 없는 불쾌감과 공포를 느꼈던 적은 (드물게)있었지만 다행히 비교적 안전한 여성 울타리에서 나는 자라왔던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 차별'을 크게 느끼지 못하며 자랐다는 의미이다.
우리 아빠는 딸만 셋있는 집의 유일한 남성(이자 가장)이었기 때문인지 그냥 아빠의 취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성의 사회진출에 대해 굉장히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또 지원해주었다. 내가 더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싶다고 하니 재수를 지원해줬고, 언니가 인지도가 낮은 서울의 대학교와 인지도가 높은 부산의 대학교 사이에서 고민할 때 성공하려면 더 큰 사회에서 배워야한다고 서울의 대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어떻게 보면 여성, 남성이라고 하는 젠더적 한계를 크게 생각하지 않고 내가 나로서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해볼 수 있었던 건 이런 부모님의 지원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우리 세자매가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부모님의 경제적 능력과 가치관은 정말 감사할 일이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정말 복받은 환경이었다. 나에겐 당연했던 선택의 순간들이 다른 여성들에겐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우리 엄마, 아빠도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옛날 사람들이라 여러 가치관 갈등이 많긴 했다.)
오히려 나는 여성우월주의자였던 것 같기도 하다. 사춘기 때에 또래 남자아이들은 유치하다고 생각했고, 공부를 잘하거나 재능있는 친구들도 다 여자인 친구들이었다. 당연히 그 친구들이 사회에 나가서 성공하고,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이 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으며 결혼, 육아와 같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의 의무'는 선택이 가능한 문제이므로, 꿈을 이루는 것이 우리들의 최우선 목표였다.
그렇게 나는 그냥 '나'로서 내가 하고싶은 꿈을 꾸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러다 서울에 와서 대학생이 되고서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대학생이 되고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여성 비율이 90%이상인 디자인학과에서 과대, 학생회장 등 각종 직책은 남자가 되는게 학과 전통인걸까? 대부분의 대학교 디자인학과는 여성비율이 높은데 유명 디자이너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 남자일까? 왜 어느 시점이 되면 업계에는 남자들만 남는걸까? 복학생 남자 선배들이 실력이 떨어지는데도 학점을 잘 받는 이유는 뭘까? (수업에 남자가 몇 없기때문에 교수님이 아끼고, 챙기는 거란다) 왜 교수님은 여자애들한테는 좋은 집안에 시집가서 취미로 작업하라고 얘기하면서 남자들에게는 치열한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을 전수해주는 걸까? 왜? 왜? 등등 이해할 수 없는 불쾌감이 쌓여갈 때, '페미니즘'이라는 여성의 언어가 이 시대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 내 머릿속을 괴롭히던 불쾌감과 의문감이 느낌표로 바뀌기 시작했다. 교수님들의 말에 왜 내가 불편함을 느꼈는지, 사람들의 인식에 왜 의문이 쌓였었는지 이해가 됐다. '아. 나는 여성이라서 차별받고 있었던 거구나.'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는 '여성'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다른 여성보다 운이 좋아서, 혹은 무지해서 내가 여성이라서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여성이 약자라는 말을 들을 때도, 단순히 무력의 차로 여성이 약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분 나빠했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온 환경에서는 여성이 더 우수했기에, 여성이 가정을 지탱해왔기에. 아들을 못 낳은 엄마가 할머니에게 비난과 구박을 받을 때에도 그런 할머니를 욕하면서 구시대적 사고라 그런 것이라며 나의 미래에는 그런 일이 없을거라 무지하게도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여성 울타리에서 보호받았기에 무지했다. 무지해서 무식했다. 무지해서 나는 엄마와도 다른 여성과도 연대하지 못했었다. 과거의 무지한 나의 당당함은 다른 여성들의 아픔에 또다른 상처를 줬을지도 모르겠다. 아, 얼마나 무식했는가. 부끄러운 과거다.
지금의 나는 무지하고 순진한 여자 아이들을 봤을때,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다. 매서운 사회의 진실에 대해 미리 경고하고 경각심을 가지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그들의 순수함이 지켜질 수 있게 내가 더 노력하고, 주변 장애물들을 막아줘야할까. 전자는 그들의 생각을 내가 휘두르는 것이 꼰대짓은 아닌지 고민하게 되고, 후자는 내가 언제까지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오히려 그들의 자립성을 해치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결국엔 연대 밖에 없다. 최대한 새 세대의 여성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이전 세대인 내가 노력하고, 그들이 상처받고 힘들어할 때 위로해주는 수밖에 없다. 내가 여성 울타리 덕분에 덜 상처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 처럼 나도 그들의 여성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다. 그것이 많이 바꾸지 못한 이전 세대의 반성을 담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과거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차별로 인해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다. 이번 대선 결과를 보고 소수자/약자에 대한 차별이 더 심해지겠구나 싶어 더욱 걱정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번에는 탈조선해야한다가 아니라 이럴 때 일수록 더욱 연대해야한다고 이야기하더라. 연대해서 도움을 주고, 위로하며 살아남아야한다고. 포기하지 않고 장기전을 대비하는 것에 감동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맞서싸우기 위해서는 힘을 비축해야하고, 혼자 싸워서는 이길 수 없기에 서로 협력해야한다. 이미 우리는 광장에서 연대해서 싸워 이겨낸 경험이 있다. 지금 현재는 암울하더라도 나는 미래에 한해서는 희망을 가지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여성'이라는 나의 정체성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사회적 약자가 아닌 시대가 오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