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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꽃 Dec 14. 2015

남겨진 뼈들

황정은, 「뼈 도둑」짧은 리뷰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개들은 왠지 모르게 공포스럽다. 편혜영의 「사육장 쪽으로」의 개들이 내게는 굉장히 공포스러웠다. 황정은의 소설에서도 개들이 처음 개장에 갇힌 채 등장했을 때 나는 편혜영의 소설이 떠오르면서 이유 모를 공포를 느꼈다. 거기에 정체가 불투명한 이웃집 모녀들까지. 내 공포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조가 시동이 걸리지 않은 차를 버려둔 채 사람들 속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은 그 순간부터 공포심은 배가 되었다. 그리고 소설을 덮을 때 공포는 어느 새 아주 옅은 슬픔으로 바뀌어 있었다. 


소설은 다소 평범하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1인칭 시점으로 시작했다가 ‘그’로 서술하는 대상이 바뀌는 등 일단 인칭이 고정적인 다수의 소설들과는 전개 방식이 다르다. 그러나 황정은의 문장은 놀라울만한 흡입력과 열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듯하다. 문장들이 길지 않아 속도감이 느껴져 쭉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역시 술술 읽히는 문장인 김영하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문장에서 기묘한 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설 안의 상황은 냉기가 가득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조는 외양간 비슷한 집에서, 유례없는 한파가 들이닥쳤는데도 모닥불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바깥에서 짖어대던 개들은 동사했고 타닥타닥 눈이 내린다. 마침내 조는 장의 뼈를 아마도 훔치기 위해 눈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한다. 지극히 차가운, 그야말로 눈 속에서 발견할 법한 이 소설은 기이하게도 밀도 높은 열기가 느껴진다. 굉장한 매력이다.  황정은만의 화법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어디에서 이 열기가 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소설이 끝나는 것이 아쉬운 소설은 실로 오랜만이다.


여기에서 조와 장은 사실은 옆집 여자들이 기르던 개들 중 먼저 얼어 죽은 개 두 마리로 비유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기독교라는 갇힌 사회는 개들이 갇혀 있는 개장과 같다. 조와 장은 이 안에서 살아가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 장은 먼저 죽는다. 죽은 장은 가족들에게서 언뜻 용서 혹은 인정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장의 장례를 끝마치고 후련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그의 뼈는 조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언덕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죽은 개의 뼈처럼, 장은 죽어서도 그들의 사회 안에 편입되지 못한 것이다. 단지 처리해야 할 어떤 것들로 여겨진 것이다. 


남겨진 조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이 결코 사회에 편입될 수 없다는 것을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 안에서 불현듯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돌아가지 않는다. 외양간은 좀 더 공간이 확장된 개장일뿐이다. 녹슨 물이 흐르고, 가망 없는 개수대가 있고 남은 것은 약간의 소금과 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그는 개들을 본다. 개들에게서 자신을 본다. 죽어버린 장을 본다. 그는 개를 먹지 못한다. 대신 다른 선택을 한다. “곁에 두고 몸을 데울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텅 비어 있는 장의 자리를 대신할 장의 또 다른 분신을 찾았다. 그래서 그는 장을 되찾으려 하지만, 옆집 모녀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다음 날, 개는 사라진다. 그가 장의 뼈를 끝내 얻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는 두 번째로 장을 상실하고 말았다. 눈이 쌓이는 하얀 풍경에서 그는 장의 ‘뼈 도둑’이 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그는 눈에 갇힌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찾아낼 수 있는, 영원히 고독한 세계에 갇히고 만다. 장과 마찬가지로. 그는 영원히 뼈 도둑이 될 수 없는 뼈 도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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