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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belbyme Nov 25. 2022

이해 불가능한 추상화를 찾아가서 보는 이유

현상학 입문: 단 자하비

런던에서 회사를 다닐 때 회사 아주 가까운 곳에 테이트 모던 갤러리가 있었다. 격무와 영어에 시달리던 신입 사원은 짧은 점심시간에 오전에 털린 멘탈을 잡기 위해 자주 테이트 모던 갤러리에 갔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는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서 갤러리에 가면 정말 전 세게에서 온 관광객이 있었다. 테이트 모던이라는 이름처럼 대부분 작품은 컨템퍼러리 아트이다. 도망친 신입 사원은 많은 관광객을 보면서 '저 사람은 현대 미술을 얼마나 알고 보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렇다고 내가 현대 미술에 식견이 있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그림을 하나도 이해 못 하겠는데 저 사람은 무엇을 좀 알고 보는 것일까?라는 궁금증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다. 사실 더 이상한 것은 관광객이 아니라 나였다. 그림을 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왜 여기로 그렇게 자주 도망쳐 왔는지 몰랐다. 그때도 지금도 감상하기 힘든 그림을 집에도 걸어둔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같은 극강으로 어려운 책도 읽고, 또 읽으면 어떤 느낌은 온다. 반면에 추상화는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해 불가능한 그림을 찾아가서 보고 집에도 걸어둘까?


현상학이라는 철학을 접하면 무조건 에포케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마치 전 세게 어떤 맥도널드를 가더라도 빅맥을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에포케는 판단 중지라는 뜻이다. 판단 중지라고 눈을 뜬 바보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현상학은 우리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며 의식된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는 오염된 의미다. 군중이 만들어낸 평균적인 수준의 의미를 우리는 현상에 부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몽고에서 온 사람이면 자동반사적으로 말, 게르, 초원 이런 것에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는 그 몽골 사람은 도시에서만 살아서 말은 말고기만 먹어본 경험 이외는 없을지라도. 즉 에포케는 일어나는 현상을 기존의 가치 기준이 아니라 현상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인지해보라는 뜻이다. 몽골 사람이 집에 들어가자 전등을 켜고, 천장형 냉난방기로 난방을 하고, 와이파를 찾는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비록 몽골 사람이지만 초원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울란바토르에서 자란 도시인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결국 내가 추상화에 계속 매료되는 이유는 추상화가 나를 에포케 상태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인생의 경험이 생겨나면 모든 현상을 자신의 편협한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 나의 자동반사적인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추상화이다. 나는 추상화를 볼 때 추상화를 판단할 어떤 기준도 이해도 없다. 추상화를 보고 받아들여야 하는 수동적인 입장이 된다. 수동적인 입자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무지의 편안함이 내가 추상화를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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